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거짓말의 장막이 걷힐 차례

등록 2017-03-15 20:08수정 2017-03-15 20:40

[ESC] 오은의 오손도손
‘손댈수록 무거워지는 트렁크’를 들고 가는 이들에게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손대면 손댈수록 무거워지는 트렁크를 들고, 침대칸을 타고, 멀리멀리 가버리는 나의 이야기”

─박상수, ‘진실게임’(<숙녀의 기분>, 문학동네, 2013) 중에서

출장을 갔다가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수령이 족히 몇 백 년은 되어 보였다. 나무 앞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느티나무 곳곳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사람들이 어루만지고 더듬고 비비고 긁어댄 흔적들이다. 사랑을 주려다 도리어 상처를 입힌 셈이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무심코 손을 댔다가 터져버리고 말았던 비눗방울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볼에 손을 댔다가 울음을 터뜨리던 갓난아이의 표정이 떠올랐다. 손을 대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손대다”는 다양한 뜻을 지녔다. 느티나무 앞 푯말처럼 그것은 기본적으로 “손으로 만지거나 건드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남의 물건에 손대면 절대 안 된다”는 엄마의 신신당부로 저 단어의 용례를 처음 익혔다. 어렸을 때는 손대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관심이 없다가도 더 열렬히 손대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 바람에 탁자 위의 꽃병은 와장창 깨졌고, 친구가 힘겹게 분 풍선은 순식간에 터져버렸다. 손댄 것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당시에는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우는 것밖에는 방법을 몰랐다. 한 가지만 명확해질 뿐이었다. 한번 손대고 나면 손대기 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뜨거운 것, 차가운 것, 날카로운 것 등 위험한 것에도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한편, 남을 때리거나 성적 행위를 가하는 상황에서도 손을 댄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때 손대는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다. 위험한 것에 손대면 스스로 다치지만, 반대로 위험한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이때 손대는 일은 폭력과 관계가 있다. 섣불리 손을 댔다가 상대를 다치게 할 수도, 내가 다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연약한 대상에는 더더욱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

어떤 일에 착수할 때도 손을 댄다고 표현한다. 이때의 “손대다”는 모종의 위험성을 품고 있다.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대는 사람은 설레는 마음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 훨씬 더 불안할 것이다. 매일매일 가까운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잘될까?” 발 담근 영역에서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과,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손 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보지 않은 영역에 손댈 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손을 믿어야 한다.

온 생애가 거짓말 같은 이들…
스스로 말하는 법 없는 진실은
현란한 거짓말의 진창에 가려져
우리가 손을 뻗어야만 드러난다

다 쓴 장편소설에 손을 대기로 마음먹은 사람도 비장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커다란 줄거리에 손을 대버리면 이야기 전체가 기우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고 뭉치만 쌓아놓고 차마 손대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하면 수정할 부분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테니 말이다. 이때의 “손대다”는 고치거나 매만지는 행위를 일컫는다. 고치거나 매만지는 일에 처음과 끝이 어디 있겠는가. 시작하기가 막막하고 끝내기가 저어되는 것이 바로 손대는 일이다.

작년 봄, 세 번째 시집 원고를 정리하고 몇 개월 동안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원고에 손대기 싫어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고에 손대는 것이 무서워서 나는 자꾸 핑계를 만들고 도망 다녔다. 회사 일이 많아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의 약속을 거절할 수 없어서 원고에 손대는 일을 당장 오늘 할 수는 없었다. 손끝 하나 까딱 안 했는데도 오늘은 어제가 되고 금세 그제가 되었다. 아무리 손을 대도 티가 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손대는 일에는 용기뿐만 아니라 꾸준함과 끈질김 역시 필요했던 것이다.

손대는 일이 유혹과 만나면 치명적인 상황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예컨대 남의 재물을 불법으로 가지거나 쓸 때도 손댄다고 표현하지 않는가. 형제자매의 저금통에 손대던 사람이 남의 지갑에 손대고 돈에 눈이 멀어 결국 공금에까지 손을 대게 된다. 손대는 일을 할 때마다 손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대상을 향한 욕망만 갈수록 커지는 셈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손을 잘못 대면 나쁜 일에 휘말리게 되기 십상이다. 도박에 손대거나 부동산 투기에 손대 크나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온갖 부정(不正)한 일에 개입되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손댔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경우에 우리는 좌절한다.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붓글씨를 쓰고 먹물이 다 말랐는지 손을 댔다가 화선지 전체가 얼룩진 적이 있었다. 아무리 다시 써도 그때의 그 글씨를 쓸 수는 없었다. 한번은 바늘 끝에 손을 잘못 댔다가 피가 난 적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피는 멎었지만, 바늘에 찔려 피가 나오던 순간은 두고두고 기억났다. 펀드에 손을 대 손해를 봤을 때에는 잃은 돈에 대한 미련보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내가 쓴 시에 덜컥 손을 댔다가 애초에 쓰려고 했던 시가 전혀 새로운 시가 된 경우도 있었다. 뜻하지 않게 동문서답을 해버린 당사자가 된 것 같았다.

손댄 것이 즉각적으로 반응할 때도 있다. 거짓말에 ‘손을 대면’ 그것이 거짓말처럼 부풀어 올랐다. “손대면 손댈수록 무거워지는 트렁크를 들고” 힘겹게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거짓말을 들키지 않으려고 다른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진실은 왜소해졌다. 정치인들의 청문회를 보며,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이 다른 거짓말을 낳고, 다른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불러들였다. 또 다른 거짓말은 처음의 거짓말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거짓말에 손대면 으레 두려움이 커지게 마련일 텐데, 거짓말을 하는 자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온몸이, 온 생애가 통째로 거짓말 같았다. 그 어디에서도 진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실에 ‘손대는 일’은 어렵다. 진실은 스스로 말하는 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란한 거짓말 아래에 가려져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거짓말로 가득 찬 진창에서 진실에 손대기 위해 우리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진실은 마침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거짓말에 손대면 두려움이 커지지만, 진실에 손대면 책임감이 커진다. 진실이 정의와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말했듯, 일단 한번 손대면 손대기 전으로 돌아올 수 없다. 이는 손대기 전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손대는 데에는 그만큼 강단(剛斷)이 요구된다는 말도 된다. 지난 10일,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손은 한곳을 향해 있었다. “손대다”의 마지막 뜻은 “가까이 다가가다”이다. 우리는 정의를 찾기 위해 기꺼이 진실에 손댔다. 그리고 승리했다. 이제 거짓말의 장막이 걷힐 차례다.

오은 시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