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 꽂고 뉘어 넣고 쑤셔박은 책더미. 피사의 사탑을 이룬 음반. 행거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옷들. 프라모델, 레고, 텀블러 등. 당신이 특정 종류의 물건에 애착을 갖고 곁에 모아두는 데 즐거움을 느끼며, 버릴라치면 소스라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필요한 것은 정리의 기술이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정리 팁이 가득하다. 아침방송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문가들이 새로운 수납 비법을 일러준다. 하지만 애써 따라해봐도 그때뿐이다. 잠깐 방심하면 마법처럼 도로 난장판이 된다. 이것이 몇 번 반복되면 알게 된다. 자괴감도 습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좋은 소식이 있다. 그건 당신 탓이 아니다. 좋아 보이던 비법들이 내게 와서는 쭉정이처럼 무력해져 버리는 것은 각자가 살아온 관성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분류 기준이 아무리 체계적이어도, 내 생활패턴과 맞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 될 수밖에 없다.
<검색, 사전을 삼키다>를 쓴 웹사전 기획자이며, ‘더 이상 세는 게 불가능해 언제부턴가 대충 1만장으로 퉁치는’ 레코드 수집가 정철은 어떤 정리에서도 먼저 자기 상황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는지, 뭐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남이 만들어준 체계가 아닌, 내게 맞는 정리의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정리의 목표는 내가 찾기 좋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소위 ‘검색 가능성’ 높이기다. 정리를 마음먹고 팔소매를 걷어붙일 때 ‘정돈’ 자체를 추구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당장 ‘보기 좋게’, ‘아귀가 딱딱 맞게’ 정리할 수는 있지만, 글쎄, 불편한 옷을 오래 입고 있기는 힘든 법이다. 평소 내가 뭘 찾을 때 쉬웠던 방법을 떠올려보자.
‘기타’ 항목을 잘 쓰는 것도 유용하다. 분류 기준을 기억할 수 있는 만큼만 최소화하고, 나머지를 ‘기타’ 항목에 넣는 것이다. A, B, C 그리고 기타. 기타가 너무 늘어났다 싶으면 가만히 들여다본다. 반드시 D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D를 들어내 A, B, C, D 그리고 기타의 체계를 이어나간다.
마지막으로, 버리는 것 또한 정리의 기술이다. 우선순위에 따라 가장 덜 중요한 것에 작별을 고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축적과 정리도 물리적 공간의 한도 안에서만 가능하니까.
이유미 기술감독(팟캐스트 일상기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