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생활력기술백서
우리 사회는 실패자나 스스로 한 결심을 지키지 못한 이에게 박하게 굴기로 악명 높지만, 연초만큼은 그런 평판에 관대하다. 음력과 양력, 두 ‘새해’가 모두 공휴일인 게 그 방증이다. 여기에는 새해 결심도 두번 해보라는 깊은 뜻이 있는 게 틀림없다. “한번 흐지부지됐지? 그럴 줄 알고 하나 더 준비해놨단다. 옜다, 여기 두번째 기회를 줄게!”
1월 초 닳도록 써먹어 이제 한물갔다 싶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도, 두어주 후 설날을 즈음하여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펄럭펄럭 활개를 치고 다닐 것이다. 묵은 인사말도 발딱 되살아나는데, 다른 것이라고 그러지 못할 법이 있을까. 세상 순진한 얼굴로 다시 시작해도 모두가 너그러이 이해해줄 때다. 새해도 새 출발, 우리 결심도 새 출발, 새해 복도 새 출발.
연말연시에 빠뜨렸던 신년 인사도, 돌아오는 설에 한차례 살려보면 좋겠다. 신년 인사는 뜬금없이 말문을 열기 어색할 때 특히 좋다. 오랫동안 소원했던 사람들에게 별 다른 용건도 없이 말 걸기에 그만큼 편리한 핑계가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가까이 교류하던 사람들이다. 굳이 감사를 표하기가 어색한 법이다. 편한 사이에 느닷없이 구구절절 상대에 대한 소감을 풀어 말한다면, 듣는 사람은 얼마나 당황스러울 것이며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멋쩍을 것인가. ‘이날 이렇게 감사하라’고 못 박아 지정된 날이 따로 있는 어버이나 스승이 아닌 한, 상대방과의 관계를 이른바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로 돌아볼 시간을 갖기도 쉽지 않다. 새해 인사의 구태의연함이 이럴 때 유용하다. 거기 슬쩍 올라타면 자연스럽게 관계에 촉촉이 물을 줄 수 있다.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도 좋지만, 실물 연하장이 실은 더 제격이다. 손으로 쓴 카드는 좀 구식이지만 한 바닥 쓰는 동안만큼 오롯이 그 사람에게만 집중했다는 생생한 표식이 된다.
특정 종교가 아니더라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경구는 언제나 의미 있다. 그 사람이 하는 일, 그 사람이 하는 말, 그 사람의 존재가 당연하다고 여기기를 잠시 멈추면 고마움이 새롭게 눈에 띈다. 일년에 단 한번이라도 이를 꼽아보기에 신년 인사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잘 참아줘서 고맙습니다. 잘 들어줘서 감사했어요.
이유미 기술감독(팟캐스트 일상기술연구소)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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