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는 제 잔에 마셔야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입추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가혹했던 더위도 한풀 꺾이고 나니 올여름, 무더위를 핑계로 마셔댄 맥주가 얼마큼인가 뒤늦게 실감이 났다. 맥주는 내 위장병의 주적이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나면 냉기와 탄산이 이중으로 위장을 괴롭힌다. 맥주와 근사한 궁합을 이루는 안주 중에도 위장에 좋을 녀석은 하나도 없다. 셀 수 없이 “이번주는 맥주를 끊자!”고 결심했지만 단 한번도 성공에 이르지 못했다. 여름 무더위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날씨가 서늘해지면 더 이상 핑계 댈 것도 없다. 그사이 움직인 체중계 눈금과 망가진 위장을 돌려놓으려면 가을에라도 맥주를 줄여야 한다.
여름보다는 적은 양을 마셔야 하니, 마실 때라도 더욱 맛있게 먹어야 하지 않을까. 세번 먹을 것 한번 먹어야 한다면, 세배로 맛있게 먹어야 덜 억울할 일이다. 2015년 독립출판으로 <맥주도감>을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에는 <맥주탐구생활>을 출판한 일러스트레이터 김호는 자타공인 맥주 애호가다. 스튜디오 ‘블랙아웃’(Blackout: 과음 등으로 의식을 잃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애주가의 정체성을 전혀 숨길 생각 없는 이름의 1인 창작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맥주탐구생활>에 따르면, 맥주를 맛있게 먹는 기술 첫번째는 딱 알맞은 온도로 마시는 것이다. 맥주야 무조건 차가운 게 최고라는 이야기는 탄산과 시원한 목넘김이 특징인 라거류에만 해당한다. 스타우트나 브라운 에일처럼 묵직하고 풍부한 향을 지닌 맥주라면 10도 이상의 상온이 오히려 더 적당하다. 그래도 살다 보면 당장 이가 시리도록 시원한 맥주를 마셔야 해결되는 긴급한 상황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미적지근한 맥주밖에 없더라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 맥주에 키친타월을 감은 뒤 물을 충분히 적셔 냉동실에 딱 10분만 넣어두자. 금세 얼음장처럼 시원한 맥주를 꿀꺽꿀꺽 삼킬 수 있다.
김호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기술은 유리잔에 따라 마시기다. 맥주를 잔에 따르면, 캔이나 병에 담긴 채로 마실 때는 볼 수 없는 맥주 고유의 빛깔과 거품을 볼 수 있다. “더불어 맥주의 향을 맡기에도 수월하고, 마시는 양을 조절하기도 쉬워진다”는데, 글쎄, 후자는 확신하기 어렵다. 유리잔에 따라 마시기야말로 “가장 단순하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한 기술”이라는 게 김호의 조언이다. 그래, 세번 마실 것 한번 마셔야 한다면, 설거지의 귀찮음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
제현주(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