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하루는 길고 고되다. 프로젝트는 벽에 부딪치기 일쑤고, 예상 못한 폭탄들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회의다 뭐다 하루를 다 보내고 나면, 정작 내 할 일은 글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채 화면에 멈춰 있다. 달리 도리가 있나, 저녁 먹고 돌아와 야근할 수밖에. 천근만근 무거운 귀갓길, 한줄기 산들바람 같은 버스의 빈 좌석은 어째 꼭 다른 사람 앞에만 생기는지.
놀라운 건, 그렇게 지쳐 귀가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전에 뭔가를 더 ‘한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을 켜놓고 맥주를 마시는 일부터, 오버워치(다중 사용자 1인칭 슈팅 게임), 독서, 하다못해 휴대폰 게임이라도. 그게 필생의 열정을 바칠 일도 아니고, 내일 아침 잠 부족에 후회할 것도 뻔한데, 끝끝내 밤 시간을 할애하고야 만다. 순전히 날 위해 쓰는, 그 오롯한 시간 한 조각에서 어쩌면 우리는 작은 숨구멍을 찾는 걸지도 모른다.
여행드로잉 작가 ‘어슬렁’(이미영)은 그 작은 틈새에 짧게라도 창작활동을 끼워넣어 볼 것을 권한다. 아이티(IT) 업계에서 일하던 중 가볍게 드로잉을 시작해보았다가 직업과 삶의 방식까지 바뀐 당사자로서, 그는 창작활동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선택을 강요한 빨간 약(진실을 말해주는 약)과 같다고 말한다. 수동적으로 소비하던 것을 창작활동으로 성격을 바꾸자 일상을 보는 시각이 변했다고 한다. 다른 삶의 방식까지 눈에 들어왔다. 숨통이 트이고 ‘내 세상’의 반경이 더 넓어짐은 물론이었다.
드로잉은 가장 쉽게 해볼 수 있는 창작활동이다. 어슬렁 작가는 30일간 매일 무조건 딱 15분씩만 그려보라고 조언한다. 흔한 볼펜이나 펠트펜을 쥐고, 눈으로 본 걸 손으로 그리는 과정을 즐겨보란다. 연필은 추천하지 않는데, 수정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면 과정 자체가 아닌 그림 자체를 완성하려는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볍게 많이 그려보는 게 좋다. 일주일에 한번만 드로잉을 그리는 사람은 한달 동안 2번 정도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50%를 실패했다고 느낀다. 하지만 매일 그리는 이는 10번 망쳐도 30% 정도 실패한 셈인데도 좌절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낙담하지 않고 태평하게, 꾸준히 갈 수 있는 요령이다.
물론 여가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뭔가를 시도하려면 본래 하던 일 가운데 무언가를 줄일 수밖에 없다. 창작활동을 위해 포기해도 좋을 습관이 무엇인지 한번쯤 점검해보는 것도, 나의 일상을 정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유미 기술감독(팟캐스트 일상기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