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람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생일이나 기념일도 잘 잊으며, 어제 만나 나누었던 안부를 다음날 또 묻는 바람에 친구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이 엉망진창인 기억력 때문에 낭패를 본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최근의 사례를 소개하고 싶지만 포기해야겠다. 30분 전부터 딱 하나를 떠올려 보려 애쓰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세상에, 기억력이 나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증명할 생각은 없었다.
지난해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차 하는 순간은 언제나 많았지만, 실마리가 주어지면 옅어졌던 기억도 다시 형태를 드러냈지, 이렇게 깜깜해질 만큼은 아니었다. 이 와중에 얼마 전 책 <망각의 기술>을 집어 들게 된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기억력 회복의 기술을 연마해도 모자랄 판국에 망각의 기술이라니. 책 표지에는 ‘우리가 잊는 것이 우리 자신을 만든다’라고 적혔다. 친구야 내가 엊그제 대화를 잊은 걸 용서해주길. 잊은 그 대화가 날 만들었대.
<망각의 기술>에 따르면 쥐와 인간 모두에서 수명의 후반기, 다시 말해 쥐는 한 살, 인간은 40살부터 새로 학습한 정보를 지속시키는 기제가 약해지기 시작한다고 한다. 40살 미만의 사람은 새로 학습한 정보를 적어도 1~2주 동안 기억할 수 있지만, 마흔이 넘은 사람은 기껏해야 하루 이틀 기억을 유지할 정도란다.(그래, 역시 그런 거였다) 그렇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초 학습 후에 도파민 및 노르에피네프린 강화제를 투여하면 40살이 넘은 사람의 기억도 젊은 사람 수준으로 늘릴 수 있단다.(이 사실 역시 하루 이틀 지나면 잊고 말겠지)
그러나 위안은 도파민이나 노르에피네프린에 있는 게 아니다. 망각하는 일은 유용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덕에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재빠르고 기억력이 좋지만 주의가 산만한 젊은 사람보다 40살이 넘은 사람이 경영에 적합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세부 사항을 잊어버리는 능력이 큰 그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지은이의 말대로라면 ‘사소하거나 쓸모없는 세부사항을 버리는 재능은 큰일을 하기에 적합한 자산이다.
학습과 기억 분야의 대가라는 신경생물학자 이반 이스쿠이에르두(80)가 쓴 이 책을 읽고 나니 자꾸만 흐릿해지는 기억도 능력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40살이 넘어서 생기는 기술은 ‘망각의 기술’만이 아니라 ‘정신 승리의 기술’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문득 <망각의 기술>을 읽게 된 이유를 알겠다.
제현주(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