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걸어 5분쯤 되는 거리에 호수가 있다. 한 바퀴가 1㎞쯤 된다. 집에 트레드밀(tread+mill. 일명 러닝머신)이 있지만, 나는 호숫가를 뛰는 게 좋다. 이유는 하나다. 그 1㎞의 주기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다. 트레드밀을 뛸 때면 자꾸 ‘그만 뛰고 싶다’는 생각과 싸워야 한다. 오늘 너무 피곤한데, 고관절이 좀 시큰거리는데, 워밍업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그만 뛸 이유는 언제나 많고, 달리기를 멈추기는 너무 쉽다. 딱 스위치를 꺼버리면 그만이니까.
호숫가를 뛸 때는 다르다. 1㎞의 트랙은 달릴 이유를 매분 매초 제공한다. 애써 이유를 찾지 않고도 끝까지 가게 해준다. 처음 한 100m쯤을 지나면, 뛴 것이 아까워서라도 나머지 900m를 그냥 달리게 된다. 400m 정도 지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고생은 마찬가지인 지점이다. 그저 머리를 비우고 한 바퀴를 뛰어야지,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 지점부터 달리기를 즐길 수 있다. 뛰느냐 마느냐, 이걸 왜 뛰고 있느냐 같은 생각은 할 필요도, 해봤자 소용도 없다. 그냥 뛰는 거다. 내 다리의 움직임, 상체의 흔들림, 호흡의 리듬에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생긴다. 두번째 바퀴에 돌입하면 좀더 쉽다. 첫 바퀴에선 망설임의 구간이 100m였다면, 그다음은 50m쯤으로 줄어든다.
호숫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건 물리적인 강제성 안으로 그 트랙이 나를 집어넣어 주는 덕에 끊임없이 동기를 갱신하지 않아도 되어서다. 하지만, 내가 적어도 1㎞는 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예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직장이 있던 시절엔 나는 여의도공원을 뛰었다. 여의도공원 한 바퀴는 2.5㎞쯤 된다. 평소 달리기를 하지 않는 초심자가 단번에 쉬지 않고 달리기는 부담스러운 거리다. 나도 처음에는 크게 다르지 않아 여의도공원에서 뛰겠다는 엄두가 영 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의도공원은 중간을 가로지를 수 있는 샛길이 몇 군데 있기 때문에 2.5㎞에 익숙해지기까지 트랙의 길이를 멋대로 줄이곤 했다. 그렇게 두어 주를 보내고 나서야 2.5㎞가 나의 리듬이 되었다.
운동 좀 해야지 마음먹고 트레드밀을 몇 번 달리기(혹은 걷기) 시작하다가 지레 운동을 포기해버린 일이 있다면, 트랙 뛰기를 권하고 싶다. 자신이 감당 가능한 적당한 길이의 트랙을 찾아 뛰어 보시기를. 딱 트랙의 주기 동안 그저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데서 새로운 즐거움과 만나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 가야 끝일지, 얼마큼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를 세상이다. 그런 세상의 많은 일에 대해서도, 어쩌면 마찬가지 요령을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단 감당할 수 있는 시간만큼을 트랙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면 일단 그 트랙만큼 아무 생각 없이 가보는 거다. 한 바퀴 더 할지 말지는 그때 결정하면 된다.
제현주(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