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⑥ 도쿄대 서양사학과 시절
나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 관심을 가졌고, 이시모타 쇼의 영향으로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따라서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중국이나 조선 역사를 대상으로 택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고교생활 끝무렵에 나는 러시아사 연구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결심에는 내가 러시아어를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었던 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내가 독일어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 독일어부 고문인 무토 선생이 “와다군, 독일어도 좋지만 러시아어가 미래의 언어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바로 그 무렵인 1953년 여름 <초등 로시야어>라는 잡지가 창간됐다. 그 잡지를 매월 읽어나가면 저절로 러시아어 초보를 마스터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었다. 나는 그 잡지를 정기구독하게 됐고 1년 걸려 문법을 대충 독습했다.
내가 사랑한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크로포트킨의 <어느 혁명가의 회상>을 읽고 거기서 시작(詩作) 발상을 얻었다. 나도 크로포트킨을 읽고 끌리는 바가 있었다. 그 뒤 소련의 문학연구가 에르미로프의 체홉론을 읽고 작가 체홉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19세기 러시아 사상가 게르첸의 명저 <러시아 혁명사상의 발달에 대하여>를 읽은 것은 고교 2년 때의 가을 발병하기 직전이었다.
몸이 아파 운동을 포기한 나는, 결핵에 걸렸으나 일념으로 분발해서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사할린섬까지 여행한 체홉에게 한층 더 매료당했다. 혁명운동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으나 적어도 혁명의 역사 연구만큼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일었다. 내가 러시아사를 내 인생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은 그런 사정과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1956년 봄 고교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입시에 합격해 고마바에 있는 교양학부 문화2류에 입학했다. 문학부와 교육학부에 진학하는 코스다. 그 해는 러시아사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의미깊은 해였다. 우리의 대학입시가 시작되기 전 달인 2월에 소련공산당 20차대회가 시작돼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비밀보고가 이뤄졌던 것이다.
대학에서는 어학별로 반이 나뉘어져 있었다. 나는 독일어 공부를 한 사람들이 가는 반에 들어갔다. 독일어로 시험을 본 사람, 독일어로 시험을 치르진 않았지만 고교 때 독일어 수업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반이다. 나중에 독일문학자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가 되는 후루이 유키치도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나는 시골 고등학교 독일어부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안데르센 동화를 조금 읽었을 뿐이었으니 그 반에 들어간 건 무모한 짓이었다. 나는 매일 독일어 사전을 뒤져 예습하기 바빴다.
<도설 세계문화사대계> 제19권 조선·동북아편에 실렸던 조선철사백자.
대학에 들어가서도 건강에 대한 자신감은 전혀 갖지 못했다. 미열 기미가 있는 상태가 이어졌다. 따라서 나는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서클에 참가하지도 못했다. 데모하러 가서도 노래는 부르지 않기로 작심했다. 나는 거의 대학과 하숙집만 오가는 금욕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스탈린 비판은 당시 일본 지식인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돼 있었다. 그 해 6월4일 미국 국무부가 흐루시초프 비밀보고 전문을 공표해 큰 소동이 일어났다. 스탈린 비판에 대한 내 생각은 9월24일 일기에 썼는데 옮기면 다음과 같다.
“스탈린 이론의 어느 부분과 스탈린 만년의 디스포티즘이 비판받았다.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스탈린의 언행에 미심쩍은 점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나도 스탈린의 민족주의적 또는 국수주의적 편향에 주목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숙청은 피투성이다. 그것이 소비에트동맹의 10월혁명 성공을 위해서는 불가결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죽여버리면 다시 되살릴 수 없다.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사회주의적 열정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뼈아픈 아이러니다. 소비에트 혁명은 인류가 그 변방에서 이뤄낸 장절한 사회주의 실험이다. 실험 결과는 모범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거기에서 데이터를, 지침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보려면 과학자의 냉정과 엄격함으로 그 과정을 백일하에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은 그 전년도부터 소련과 수교교섭을 하고 있었다. 전년도 여름 소련이 (북방영토) 2개 섬을 반환해도 괜찮다는 뜻을 표명한 데 대해 일본쪽이 4개 섬 모두의 반환을 요구하기로 방침을 세웠기 때문에 우리가 입학시험을 치를 무렵 런던에서의 교섭이 결렬됐다. 나는 러시아사를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음에도, 묘하게도 일-소 교섭에 대한 관심은 낮았다. 그래도 같은 날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일-소 교섭 에토로후·쿠나시리 2개 섬은 문제다. 소비에트동맹은 에토로후·쿠나시리 섬에 집착하는 일본에게 ‘이들 섬을’ 돌려주는 게 온당하다. 비군사화한다는 걸 조건으로 내걸면 되는 것 아닌가. 일-러전쟁도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이라고 주장하는 건 바로 국주주의이며,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다.”
30년 뒤 나는 4개 섬의 비군사화, 자유왕래, 환경보호, 공동개발이라는 영토문제 해결 타협안을 제안했는데, 그때 일기 가운데 위의 기술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서 ‘비군사화’에 대해 처음부터 주목하고 있었던 점을 흥미롭게 생각했다. 현실을 보면, 56년 10월 하토야마 총리가 소련을 방문해 일-소 공동선언에 조인하고 국교를 수립했다. 소련은 2개 섬 인도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강력하게 내 관심을 끈 것은 헝가리사건이었다. 소련 지배에 헝가리인들이 저항하자 소련군 탱크가 두번에 걸쳐 부다페스트를 제압하고 임레 나지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나는 이 사태를 그냥 보아넘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정보가 매우 단편적이기는 해도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리 반 급우들에게 제안해 학부 전체 토론회를 열었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사회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소련군은 헝가리에서 철수해야 하며 무력으로 밀어붙이는 사회주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는 러시아사 강의를 들을 수 없었으므로 나는 혼자 공부했다. 1957년은 러시아혁명 40돌이었다. 나는 여름방학 때 논문 <러시아혁명사 연구의 제문제>를 써서 학생문화단체 잡지에 투고했다. 혁명 전의 러시아를 후진국 발전의 전형으로 보고 혁명의 원인을 논하면서 혁명의 귀추는 옛체제의 저항력, 혁명적 엘리트의 지도력, 대중의 혁명적 에너지간의 밸런스(균형)에 따라 결정된다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이 논문을 쓴 뒤 젊은 러시아사연구자 모임인 재야단체 러시아사연구회에 참가하게 됐다. 이 모임은 1956년 1월에 설립돼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당시 거기에 모인 사람들중 다수는 고등학교 세계사담당 교사들이었다. 내게는 형과 같은 사람들이 학부 2년생인 나를 동료로 대등하게 대우해주었다. 연구회가 끝나면 우리는 골목길을 걸어 시부야까지 간 뒤 그곳 라면집 2층에 올라가 이야기에 몰두했다. 연구회도 라면집 2차도 모두 유익했다. 그것이 <나의 대학>(고리키)이었던 셈이다.
1958년 4월 나는 도쿄 혼고에 있는 도쿄대 문학부 서양사학과에 진학했다. 독일사의 하야시 겐타로, 프랑스사의 시바타 미치오가 내 선생님이었다. 여기에도 러시아사 강의는 없었다. 나는 이탈리아인 역사가 프랑코 벤투리의 대저를 독파하고 나로드니키 사상과 운동에 대해 졸업논문을 썼다.
그해 1958년은 재일조선인의 북한으로의 ‘귀국운동’(북송)이 시작된 해로, 그것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졌다. 내 고교시절 서클 동료였던 Y의 신상에도 그 일은 영향을 주었으며, 서양사학과 1년 위에는 나중에 총련 활동가가 되는 오재두씨가 있었고, 같은 학년에는 러시아사를 전공한 N군도 있었다. 조선문제에 남보다 갑절로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귀국운동’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0만명의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이주해가는 엄청난 일이 내 생활과는 전혀 접촉점이 없었던 것이다.
대학 4년생이던 해 10월부터 나는 도쿄여자대의 이와마 도오루 선생 부탁으로 가도카와(角川) 서점의 <도설 세계문화사대계> 12권, 동유럽·러시아 편집 조수를 했다. 출판사 편집부는 내게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는데, 그 일 팀장을 하고 있던 오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조선·동북아시아> 권을 담당했는데 그 책이 나오자 내게 한 권을 주었다. 권두화에 마애석불과 호랑이를 그린 조선철사백자 등이 수록돼 있어 나는 처음으로 ‘조선 미’의 세계와 대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