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한승동의 동서횡단
“할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다면 전쟁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전쟁에 패한 것이겠죠. 저는 여전히 일본인이 백인들의 침략에 용감히 맞서 싸웠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겨레21〉(7월16일 발행·제669호) 인터뷰에서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67)는 그렇게 말했다.
도조는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기 직전인 1941년 10월부터 1944년 7월까지 총리와 여러 각료직을 겸직하면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총지휘했다. 도조의 손녀 유코는 아직도 조선을 빼앗긴 일본땅이라고 생각하는 일본 우익의 정서를 대변한다. 그의 머릿속에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 지배, 중국 침략은 침략으로 각인돼 있지 않다. “한국인들은 일-한합병이라는 민족적 슬픔이 있었지만, 그런 슬픔을 극복하고 일본 군인으로서 열심히 싸워주었다”며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한 그의 ‘폭언’은 그런 기억의 연장선 위에 있다.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먼저 전쟁 유족이나 전상자들에게 뿌리는 한 해 1조5천억엔(11조원이 넘는다)의 수혜 대상에 재일 조선인 등 전쟁에 강제 동원당한 비일본 국적자 유족과 전상자도 포함시키라고 요구하는 단식투쟁이라도 벌이는 게 순서 아닐까.
함께 실린 일본인 기자의 ‘야스쿠니를 지키는 삼각동맹’을 보면 그 막대한 돈은 일본 우익을 살찌우는 황금 달걀이다. 그 돈이 후생노동성을 통해 100만 가구에 이른다는 일본유족회로 흘러들어가고 그 일부가 다시 야스쿠니 신사로 간다. 야스쿠니는 유족회, 전우회의 각종 은급, 원호금 수령을 정당화하는 상징물이자 정치적 장치다. 막대한 수의 유족회 회원들은 자민당원이다. 정치적 야심가가 기를 쓰고 야스쿠니에 참배하려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자민당원만이 참여하는 총재 선거에서 이겨야 총리가 된다. 총리나 야심가들은 원호법 등을 만들고 고쳐 이에 보답한다.
도조 내각 때 상공대신과 군수차관(장관은 도조가 겸임)으로 도조와 함께 대미전쟁을 총지휘한 사람이 기시 노부스케다. 기시는 이미 자신이 그렸다는 괴뢰국가 만주국 고관시절(그는 실세 중의 실세인 총무청 차장이었다)부터 헌병대 사령관에서 참모장으로 승승장구하면서 관동군을 주무른 도조와 죽이 맞는 한통속이었다. 일본 점령국 미국은 같은 A급전범인데도 도조는 죽이고 기시는 살렸다. 기시는 미국이 지원공작을 벌인 1955년의 보수합동(55년 체제)을 성사시켜 친미적 자민당 일당 장기집권 체제를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었고,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미-일 군사동맹 강화)이라는 시대의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미국에 보답했다.
도조 유코는 “할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단다. “할아버지는 국가를 위해 돌아가신 매우 훌륭한 분”이라는 것이다. 아주 유사한, 어쩌면 똑같은 기억과 정신세계의 소유자가 현재 일본을 이끌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를 세상 누구보다 존경한다고 했다. 그가 집착하는 현행 헌법 개정도 외조부의 유지(遺志)다.
흥남질소비료공장을 경영했던 일본질소의 직원이었던 아버지 부임지인 식민지 서울 경성에서 1939년에 태어난 유코는 이달 말 참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할아버지 ‘명예’를 걸고.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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