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 인간이 증언하는 폭력의 시간
첫 장면. 김남진은 네 개의 다리를 이리 접고 저리 접는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문득 입을 여는데, 이미 뒤죽박죽인 언어다. 분열적인 목소리가 가닿는 것은 정신적 외상의 고백이다. “나는 그날 개처럼 맞았어.” 이 대사를 반복하며 쩔어버린 신체가 이윽고 그 폭력의 추억을 악몽으로 무대에 쏟아놓는다.
강남역 한복판에 자리잡은 엘아이지(LIG) 소극장에서 김남진의 <더 월(The Wall)>을 개관공연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다. 이 문제작은 표현의 한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무정부주의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긋나긋한 춤이 있는 무대가 아니라 현실적인 폭력이 어떻게 생겨나고 장기 지속하는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공연이다. 이처럼 하드코어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이 엘아이지 소극장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차후의 이정표가 되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악몽은 어떻게 물질화하고 현실화하는가. 변두리의 허름한 풍경이 설치되고 억센 부산 사투리와 짧고 강한 대사, 그리고 단호한 몸짓의 무용수들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농구공이 무대에 던져지자, 한 무용수가 다른 무용수의 몸을 바닥에 내던진다. 폭력의 내면화이다. 견디다 못한 그 무용수가 객석까지 도망가자, 뒤쫓던 무용수들은 그를 벽에 압착시켰다가 바닥에서 집단 린치의 분위기로 몰고간다. 그 와중에 김남진은 그 희생자와 폭력의 리듬을 내재화시킨 허슬 댄스로 신체의 압박 강도를 높인다.
결정적인 순간, 폭력을 행사하는 입장의 김남진이 오히려 열에 들떠 예의 분열적인 웃음과 함께 폭력의 추억에 사로잡힌다. 그러자 그는 희생자로 돌변하고 핏물이 흐른다. 상처받은 짐승처럼 걸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두 발로 걷고 짐승은 네 발로 걷고.” 왜 첫 장면에서 네 개의 다리 중 두 짝이 떼어졌는지 비로소 이해된다. 김남진은 인간이 겪는 짐승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더 월>은 폭력의 문제를 자체적으로 분화시키기도 하지만, 성형이나 골프 파동 같은 세태와도 연결짓는다. 맥락과 상관없이 거칠게 이어지는데, 그것은 악몽의 구조 속에서 풍자적으로 섞는 식이다. 천정에서 무대 가득 쏟아진 골프공을 치듯 인형의 신체를 골프채로 강타하거나 성형되는 몸 위로 금속과 풍선이 지나가는 것이다. 미화도 여과도 없는 표현이 지성에 물들지 않은 잔혹성의 리듬 속에서 역동한다. 이것은 단순하면서도 험난한 길인데, 김남진에게는 더할 수 없을 정도다.
폭력의 기원을 즉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외부와 소통하는 문법인데, 이것은 세계적인 명성의 ‘세 드 라 베 무용단’에서 활약해온 김남진의 성장이기도 하다. 소란과 린치, 살해욕과 휴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모두 신체적 육박에 힘입어서 순도높게 꿈틀댄다. 무대는 진보를 믿지 않는다. 삶을 일그러뜨리는 폭력이 신체에 수축되고 발작하는 그 진실에 기댈 뿐이다.
김남수/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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