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본 세상을 눈앞에 펼치기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고 했던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소년이 시각장애인일 때, 실제로 그 별은 마음속에서 소리의 울림으로 다가와야 할 것 같다. 퍼포먼스 공연 〈위트 앤 비트〉(~24일 문화일보홀)는 한 소년이 라디오를 듣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무대에 재현된다는 설정이다. 그래서 별빛은 수화를 보여주는 형광의 이모티콘이 펼치는 개그 퍼포먼스로 펼쳐지고, 별자리는 하늘을 촘촘한 사연 가득한 그물로 그려진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감각으로 전이되는 상상력의 무대가 되는 셈이다.
〈위트 앤 비트〉의 매력은 ‘소리의 발견’에 있다.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플라스틱 배수관이라든가, 나무 계단, 돌아가는 환풍기, 자동차 바퀴를 두드릴 때의 소음이 울림통을 통해 어느새 들을 만한 색채의 소리가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음악’의 단계로 부드럽고 정밀하게 조절한 것이 이 공연의 장점이다. 라디오 디제이가 〈어머나〉를 소개하자, 무대의 배우들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다음 순간, 페트병을 두드려 능청맞게 ‘뽕짝’을 뽑아낸다. 에스에프풍의 영화가 소개될 때는 공기분사기를 이용한 사운드트랙이 마음껏 전위음악(?)의 특권을 누리기도 하고, 〈에델바이스〉 연주 때는 ‘고음불가’ 버전이 탄생하기도 한다.
〈난타〉와 〈점프〉에 관여했던 몇몇 스태프들이 새 의욕으로 뭉쳐 만든 공연이라 그런지, 무대가 상상력을 받쳐주는 권능이 매우 세고 음악적 설계가 뛰어나다. 또한 현재 우리가 누리는 미디어의 세계를 라디오, 티브이로 분류하고, 라디오의 청각 체험이 어떻게 무대의 실재 체험과 만날 수 있는지를 매우 행복하게 실험한다.
컵과 실로 만든 장난감 전화에 핀마이크를 달아 라이브 연주를 하는 장면도 매우 완성도 있다. 다만 초반에 야광의 수화(이모티콘 놀이)를 하고 해골춤으로 흥을 돋우는 장면이 뒤로 갈수록 애조띤 음색의 연주 장면으로 처지는 것 같다. 확실히 〈위트 앤 비트〉의 후반부는 소년이 시각장애를 암담한 현실로서 느끼는 듯한 슬픔의 뉘앙스가 촉촉하게 배어든다. 5살 이하의 어린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이 퍼포먼스 공연은 소리와 춤, 놀이정신이 경쾌하고 활발하다. 그럼에도 하늘의 별자리를 그물망 구조로 펼쳐놓은 장면에서 소년의 웃음은 기괴하다. 음악소리를 내는 별들의 연주를 들었다는 것이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노골적인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점점 미디어화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감각도 달라진다. 〈위트 앤 비트〉는 소년의 상상이라는 설정이 주는 가냘픔의 문제, 시간이 해결해 줄 숙련도의 문제, 장면 사이의 전환이 주는 부드러운 아교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는 있다. 하지만 감각이 달라지는 현실 속에서 다양한 감각의 전이를 통해 시각 위주의 문화가 청각과 촉각의 무대와 함께 가야 한다는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 다음에 볼 때는 더욱 탄탄하게 진화해 있을 것 같아 미래가 기대되는 공연이다.
김남수/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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