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무대X파일 - 테너 엔리코 카루소(2)
땅딸막한 작은 키에 외견상으로는 별볼일이 없었던 카루소의 음역이 본래 테너가 아니라 바리톤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지원아래 처음 레슨을 받을 당시 그는 바리톤으로 시작했고, 이 음역으로 최소한 10년을 공부했다. 때문에 그의 어둡고 선이 굵은 목소리를 때로는 바리톤으로 혼동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명시절 바리톤 카루소를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열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탈리아 고향마을의 한 식당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그는 어지간히 못부르는다는 이유로 식당 주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며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식당에서 쫓겨난 카루소는 색다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낮에 공장에서 함께 일을 하던 남자 노동자에게 저녁을 얻어먹는 댓가로 카루소는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집 창문 밖에서 세레나데를 불러주었던 것이다. 카루소가 어디선가 숨어서 노래를 부르면 그 남자는 어두운 달빛아래에서 연기를 하며 립싱크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이 남자가 결국 사랑에 골인하자, 카루소의 달콤한 목소리는 금세 노동자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이 립싱크 아르바이트로 적어도 카루소는 저녁을 굶지는 않아도 되었다. 마침내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스승 베루지네를 만나 테너로 전향한 뒤 온전한 목소리를 찾은 카루소는 바리톤이 아닌 ‘황금의 테너’로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유명세가 천장을 찌를 즈음 자신을 음치라는 이유로 해고시킨 식당 주인이 찾아와 “옛 정을 생각해 한 곡만 불러달라”고 통사정을 할 때에도 그는 냉담하게 식당주인을 내쫓으며 지난날의 ‘수모(?)’를 갚았다.
흥미롭게도 카루소의 립싱크가 다만 배고픈 젊은 시절로 끝나지 않았다. 190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푸치니의 <라 보엠>이 상연되고 있었다. 한데 콜리네 역을 노래하던 남자 가수가 예기치않게 공연 도중 목소리가 잠겨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낡은 외투의 노래’를 부르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 성악가는 무대에 등장했고, 입을 벌렸다. 놀랍게도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의 임자는 따로 있었으니, 당시 로돌포 역으로 함께 무대에 출연했던 테너 엔리코 카루소였다.
그는 객석을 등진 채 테너가 아닌 베이스의 목소리로 완벽하게 ‘낡은 외투의 노래’를 소화해내고 있었다. 바리톤으로 노래를 시작하고 다른 사람 대신 사랑을 노래해주던 립싱크의 젊은 추억이 카루소에게 이런 기지를 발휘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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