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고진은 변화하는 현상 뒤에 숨은 ‘불변의 법칙’을 추구해온 고전 과학에 이의를 제기하고, 불완전한 비평형 상태가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림은 사물을 ‘재현’하는 고전적 화법이 오히려 이미지를 조작한다고 믿었던 초현실주의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1953년, 미국 메닐미술관 소장).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
프리고진 스텐저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비평형 열역학을 개척한 일리야 프리고진이 이사벨 스텐저스와 함께 펴낸 <새로운 동맹>(1979년)은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을 보완해서 영어로 번역 출간한 책의 제목이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본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카오스 이론’과 일맥 닿아 있다. 프리고진은 열역학적 평형 상태는 자연에서 드문 현상이고 오히려 비평형 상태가 일반적이라는 데에 착안했다. 계(시스템)의 안정적 ‘있음’(being)의 상태를 연구하는 것이 평형 열역학이라면, 불안정적 ‘됨’(becoming)의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 비평형 열역학이다. 그가 주장하는 ‘복잡성의 과학’은 열역학적으로 비평형 상태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돌이킬 수 없이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비가역적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복잡성이란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복잡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매서운 과학자의 눈을 가진 동역학과 자연의 흐름을 듣는 귀를 가진 열역학의 연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불확실성과 지혜롭게 공생하는 실마리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런 복잡계에서는 미시적 요동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요동이 증폭되므로 불안정한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 프리고진은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열린 계’가 평형에서 멀리 있으면, 증폭되는 요동의 결과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주위에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오히려 엔트로피를 무산(霧散)시키면서, 거시적으로 안정한 새로운 구조가 출현할 수 있음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비평형과 비가역성이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안에는 프리고진이 과학의 역사에 던지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시간의 재발견’이다. 비평형 열역학은 ‘됨’ 또는 ‘생성’을 연구하는 것이며, 됨의 과정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방향성을 전제한다. 우리 일상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비가역적 속성으로서의 시간’이, 과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잊혀진 차원”이라는 것이다. 뉴턴의 역학으로 대표되는 “고전과학에서는 시간과 무관한 법칙들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마찰 없는 진자의 운동이나 행성의 궤도 같이 “일단 어떤 계의 특별한 상태가 측정되면, 고전과학의 가역적 법칙들이 이 계의 과거를 결정했던 것처럼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현상의 뒤에 숨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것에 매우 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에게도 과학은 나타난 그대로의 세계를 넘어서 지고한 합리성의 ‘영원한’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였으므로, 시간은 환상으로 치부되었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조차도 “확률은 드러나지만 비가역성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의 비가역성을 재발견한다는 것은 ‘변화에 대한 포괄적 이론’에 도전한다는 의미이다. 인간 이성은 변화 뒤에 숨은 불변의 법칙을 설명하는 과학적·형이상학적 모델을 제시해왔지만, 변화 그 자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데는 항상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서구 사상의 핵심 문제인 ‘있음’과 ‘됨’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과업이 되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프리고진은 통합적 인식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른바 ‘두 문화’로 분리되어 왔던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동맹해야 하며, 물리학과 생물학, 동역학과 열역학이 연합해야 하는 것이다. 과학과 예술의 창조성이라는 차원에서도 과학의 편협함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고전 동역학은 ‘메두사의 눈’으로 자연을 본다. 과학자의 매섭고 엄밀한 시선으로 자연을 하나의 ‘조형물’로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지만 현대의 열역학은 ‘오르페우스의 귀’를 가지려 한다. 자연의 소리를 시간의 비가역적 흐름에 따라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가역적이고 거의 순환적인 소음의 수준으로부터 확률적이고 동시에 시간의 방향성을 지닌 음악이 떠오르는 것이다.” 고전과학이 ‘우주의 그림’을 그리려 했다면, 현대과학은 ‘우주의 노래’를 들려주려 한다.
프리고진은 우리가 “제한된 희망에 대한 공감만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메두사의 눈에 오르페우스의 귀를 보완하는 새로운 동맹이 희망의 공감이라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은 불확실성과 지혜롭게 공생하는 실마리를 잡는 일이 될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프리고진 스텐저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비평형 열역학을 개척한 일리야 프리고진이 이사벨 스텐저스와 함께 펴낸 <새로운 동맹>(1979년)은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을 보완해서 영어로 번역 출간한 책의 제목이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본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카오스 이론’과 일맥 닿아 있다. 프리고진은 열역학적 평형 상태는 자연에서 드문 현상이고 오히려 비평형 상태가 일반적이라는 데에 착안했다. 계(시스템)의 안정적 ‘있음’(being)의 상태를 연구하는 것이 평형 열역학이라면, 불안정적 ‘됨’(becoming)의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 비평형 열역학이다. 그가 주장하는 ‘복잡성의 과학’은 열역학적으로 비평형 상태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돌이킬 수 없이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비가역적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복잡성이란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복잡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매서운 과학자의 눈을 가진 동역학과 자연의 흐름을 듣는 귀를 가진 열역학의 연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불확실성과 지혜롭게 공생하는 실마리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런 복잡계에서는 미시적 요동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요동이 증폭되므로 불안정한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 프리고진은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열린 계’가 평형에서 멀리 있으면, 증폭되는 요동의 결과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주위에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오히려 엔트로피를 무산(霧散)시키면서, 거시적으로 안정한 새로운 구조가 출현할 수 있음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비평형과 비가역성이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안에는 프리고진이 과학의 역사에 던지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시간의 재발견’이다. 비평형 열역학은 ‘됨’ 또는 ‘생성’을 연구하는 것이며, 됨의 과정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방향성을 전제한다. 우리 일상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비가역적 속성으로서의 시간’이, 과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잊혀진 차원”이라는 것이다. 뉴턴의 역학으로 대표되는 “고전과학에서는 시간과 무관한 법칙들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마찰 없는 진자의 운동이나 행성의 궤도 같이 “일단 어떤 계의 특별한 상태가 측정되면, 고전과학의 가역적 법칙들이 이 계의 과거를 결정했던 것처럼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현상의 뒤에 숨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것에 매우 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에게도 과학은 나타난 그대로의 세계를 넘어서 지고한 합리성의 ‘영원한’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였으므로, 시간은 환상으로 치부되었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조차도 “확률은 드러나지만 비가역성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의 비가역성을 재발견한다는 것은 ‘변화에 대한 포괄적 이론’에 도전한다는 의미이다. 인간 이성은 변화 뒤에 숨은 불변의 법칙을 설명하는 과학적·형이상학적 모델을 제시해왔지만, 변화 그 자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데는 항상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서구 사상의 핵심 문제인 ‘있음’과 ‘됨’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과업이 되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프리고진은 통합적 인식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른바 ‘두 문화’로 분리되어 왔던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동맹해야 하며, 물리학과 생물학, 동역학과 열역학이 연합해야 하는 것이다. 과학과 예술의 창조성이라는 차원에서도 과학의 편협함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고전 동역학은 ‘메두사의 눈’으로 자연을 본다. 과학자의 매섭고 엄밀한 시선으로 자연을 하나의 ‘조형물’로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지만 현대의 열역학은 ‘오르페우스의 귀’를 가지려 한다. 자연의 소리를 시간의 비가역적 흐름에 따라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가역적이고 거의 순환적인 소음의 수준으로부터 확률적이고 동시에 시간의 방향성을 지닌 음악이 떠오르는 것이다.” 고전과학이 ‘우주의 그림’을 그리려 했다면, 현대과학은 ‘우주의 노래’를 들려주려 한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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