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 와이즈멘토 이사, 곰TV 과학 강사
이범의거꾸로공부법/
강남지역에서 여섯 살짜리 첫 아이를 키우다 보니, 첨단 유행은 다 경험하는 것 같다. 아이가 또래 평균키보다 작다고 노심초사하던 아내가 ‘성장 클리닉’ 광고지를 놓고 고민하곤 한다. 원래 키는 유전적 영향이 가장 크다. 우리 부부 모두 키가 큰 편이 아니니 아이가 작아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아내를 위로하지만, 나 역시 내심 불안하기도 하다.
그런데 성장클리닉에 찾아가 약을 먹여봤자 그 효과는 당연히 모호할 것이다. 원하는 만큼 키가 크면 ‘성장클리닉 덕’이 되고, 키가 크지 못해도 ‘그나마 처방 덕분에 그 정도라도 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영재교육을 표방하는 학원들도 이와 똑같다.
예전에는 ‘영재성’이란 소수의 아이들에게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후천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어찌된 일인지, 영재교육을 표방하는 학원들은 하나같이 어떤 교육학자의 새 학설을 대문짝만하게 광고한다. 모든 아이들은 영재성을 타고나며, 그것을 발견해 적절히 키워주느냐가 영재성 실현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과연 ‘학설’ 이상으로 검증된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사뭇 의욕을 불태운다.
얼마 전 아내가 첫 아이를 데리고 유명한 사설 영재교육원에 데려가 테스트를 받았다. 너댓명 가운데 우리 아이만 상위 3%에 속한다는 판정이 나왔으니 프로그램에 등록하더란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아내는 냉큼 등록했다. 3개월째 되던 어느 날 아이의 수학 교재를 들여다보던 나는 너무 한심한 생각에 당장 그만두게 했다. 원리를 심층적·다각적으로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아니라, 순전히 ‘문제를 위한 문제’로 도배해놓은 것이다! 무늬만 영재교육이지, 보통 학교나 학원에서 배우는 걸 조금 빨리 선행한다는 것을 빼놓고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영재교육 열풍의 진원지는 교육당국이다. 교육청과 대학들이 어쭙잖은 공인 영재교육원들을 운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사교육 시장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려준 것이다. 그 결과 공인 영재교육원에 보내기 위한 사설 영재교육원들이 판을 치고, 공인 영재교육원에 선발된 아이들도 진정한 영재성을 가져서 합격한 것인지 아니면 예상문제 유형을 미리 연습해서 합격한 것인지 분별하기가 불가능해져버렸다. 어느 유명 대학 부설 영재교육원은 선발시험에서 노골적으로 선행학습을 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로 도배질한다. 이런 식이라면 진정한 영재를 짜증나게 할지도 모른다.
사설 영재교육원을 그만두게 하고 대신 아이에게 상호작용형 학습CD롬들을 줬더니 영재교육원을 지겨워하던 아이가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투자 대비 효과도 훨씬 뛰어나다. 우리 가족만의 대안 영재교육(?)이 출발한 셈이다.
이범 와이즈멘토 이사, 곰TV 과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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