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
유럽에서 교육철학을 전공한 대단한 독설가를 한 분 알고 있다. 이 분에 따르면 한국 학교는 ‘교육’이 아니라 ‘사육’이 이뤄지는 곳이란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면밀히 고찰해보면 학생들만 사육되는 것이 아니다. 교사도 사육되고 있다. 교사 사육은 학생 사육과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이것은 교육선진화를 가로막는 결정적인 걸림돌이다.
교사들이 사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살펴보자. 우선 교과서부터 붕어빵이다. 많은 검인정 교과서들이 소단원 제목과 순서까지 일치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교사용 지침서에 ‘이런 것은 가르치고 저런 것은 가르치지 말라’는 내용까지 자세히 적혀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교장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식 권력구조는 눈치와 보신주의를 조장한다. 위에서 요구하는 각종 서류 만들기에 시간을 우선 할애해야 하고, 학생들에게 에너지를 투여하기보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데 신경써야 원활한 승진이 가능하다.
엄청난 임용고시 경쟁률을 뚫고 교직에 첫발을 디딘 유능한 젊은 교사들도, 이같은 철저한 관료적 통제 속에서 몇년을 보내고 나면 사기가 꺾이고 체념과 포기의 정서에 길들여진다. 학생들의 발표니 토론이니 수업참여니 하는 것들은 다 교육청 나리들이 행차할 때나 잠깐 흉내내보는 사치일 뿐이다. 사회적 풍향계도 잃어버린다. 오죽하면 증권가 속설에 ‘객장에 농부와 선생이 나타나면 꼭지’라던가.
‘사육’되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사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입식 교육은 필연적이다. 교육경쟁력 1위인 핀란드 같은 나라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미국하고만 견줘봐도 교수학습방법론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미국 학생들이 남북전쟁의 배경과 의미에 대해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는 동안, 우리나라 학생들은 임진왜란에 대한 지루한 주입식 강의를 들은 뒤 암기해야 할 사건연대와 인물 목록을 보고 한숨을 내쉰다. 미국 학교의 숙제는 수업 내용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실제로 발표와 토론거리로 활용되지만, 우리나라의 수행평가 답안지는 교사의 캐비넷 속에서 안식할 뿐이다. 멋모르는 언론은 ‘학교교사가 학원강사보다 못하다’며 질타한다. 그런데 학교와 학원이 동일한 주입식 교육으로 경쟁하는 상황에서, 시장경쟁에 노출되어있는 학원이 학교보다 잘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학교교사와 학원강사가 동일선상에서 비교되도록 만드는 근본 원인을 외면한 채 교사를 동네북삼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학교교육이 주입식에서 벗어나 참여형·소통형으로 탈바꿈한다면, 학교와 학원은 비교할래야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최근 미국에서도 학원이 확산되고 있다지만 그것은 SAT(대학수학능력시험)를 위한 학원일 뿐 GPA(내신성적)를 위한 학원은 없다. 왜 그러하겠는가? 학교교육이 강의-과제(읽기·쓰기)-발표-토론의 연속으로 이뤄지므로, 내신성적을 잘 받기 위한 과외나 학원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요즘 사회분위기 하에서 ‘자율인가, 규제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무조건 ‘자율’이 판정승을 거두게 되어있다. 그런데 뭔가 수상하다. 왜 ‘학교’나 ‘사학재단’의 자율성만 거론되는가? 왜 ‘교사’의 자율성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것일까? 진정한 자율성의 단위가 집단이나 단체가 아닌 ‘개인’이라는 것은 근대의 상식이 아니던가? 사육을 거부하는 교사들의 진정한 대중운동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그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와이즈멘토 이사, EBS·곰TV 강사
‘사육’되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사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입식 교육은 필연적이다. 교육경쟁력 1위인 핀란드 같은 나라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미국하고만 견줘봐도 교수학습방법론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미국 학생들이 남북전쟁의 배경과 의미에 대해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는 동안, 우리나라 학생들은 임진왜란에 대한 지루한 주입식 강의를 들은 뒤 암기해야 할 사건연대와 인물 목록을 보고 한숨을 내쉰다. 미국 학교의 숙제는 수업 내용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실제로 발표와 토론거리로 활용되지만, 우리나라의 수행평가 답안지는 교사의 캐비넷 속에서 안식할 뿐이다. 멋모르는 언론은 ‘학교교사가 학원강사보다 못하다’며 질타한다. 그런데 학교와 학원이 동일한 주입식 교육으로 경쟁하는 상황에서, 시장경쟁에 노출되어있는 학원이 학교보다 잘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학교교사와 학원강사가 동일선상에서 비교되도록 만드는 근본 원인을 외면한 채 교사를 동네북삼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학교교육이 주입식에서 벗어나 참여형·소통형으로 탈바꿈한다면, 학교와 학원은 비교할래야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최근 미국에서도 학원이 확산되고 있다지만 그것은 SAT(대학수학능력시험)를 위한 학원일 뿐 GPA(내신성적)를 위한 학원은 없다. 왜 그러하겠는가? 학교교육이 강의-과제(읽기·쓰기)-발표-토론의 연속으로 이뤄지므로, 내신성적을 잘 받기 위한 과외나 학원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요즘 사회분위기 하에서 ‘자율인가, 규제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무조건 ‘자율’이 판정승을 거두게 되어있다. 그런데 뭔가 수상하다. 왜 ‘학교’나 ‘사학재단’의 자율성만 거론되는가? 왜 ‘교사’의 자율성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것일까? 진정한 자율성의 단위가 집단이나 단체가 아닌 ‘개인’이라는 것은 근대의 상식이 아니던가? 사육을 거부하는 교사들의 진정한 대중운동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그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와이즈멘토 이사, EBS·곰TV 강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