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
언젠가부터 한국 학생들의 학력이 저하되고 있으며 그 원인이 고교평준화에 있다는 믿음이 확산됐다. 그러나 OECD 가입국들을 포함하는 국제학습도달도(PISA) 국가별 평가를 보면 우리나라 중고생의 문제 해결 능력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백보 양보해 최근에 학력이 낮아지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것이 무려 30여년 전에 시작된 고교평준화의 결과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학력저하론은 왜 제기됐으며, 그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학력저하론은 90년대 말 이후 서울대 이공계열 교수들을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왜? 이 때가 서울대 공대·자연대 학과들의 커트라인이 지방대 의대보다 낮아진 시점이다. 외환위기 때 목격된 연구인력의 대량해고와 사회 전반적인 고용불안정의 결과, 90년대 내내 조금씩 퍼지던 이과 기피심리가 이때부터 급격히 심화됐고, 이과에서 최상위권 성적대의 학생이 의약계열을 택하지 않고 이공계열로 진학하면 ‘괴짜’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여파를 고스란히 안게 된 이공계열 교수들은 진짜 원인을 규명해 이를 사회적으로 교정하려고 시도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 수준이 떨어졌어’라는 속좁은 넋두리를 해댔고 이는 언론에 경쟁적으로 보도됐다.
이에 뒤이어 교육당국의 실책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교육과정이 5차에서 6차로(99학년도 대입), 그리고 다시 7차로(2005학년 대입) 변경되는 와중에 과학 교과내용 분량이 감소했다. 특히 6차 교육과정까지는 대부분의 이과생이 고2~고3 시기에 물·화·생·지Ⅱ를 모두 공부했던 반면, 7차 교육과정이 되면서 물·화·생·지Ⅱ 가운데 한두 과목만을 선택해 공부하게 됐고, 그것도 고3에 올라온 뒤에야 배우게 됐다. 포물선운동·원운동, 화학평형, DNA, 전향력 등이 ‘이과생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배우는’ 개념이 아니라 ‘특정 과목을 선택해야만 배울 수 있는’ 내용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학은 더 황당했다. 일단 7차교육과정부터 문과 수학에서 미적분이 빠졌다. 이 때문에 고교 경제 과목의 내용이 일부 개편됐고, 경제학개론 시간에 교수가 ‘예전같으면 5분이면 될 설명을 1시간 동안 하는’ 진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때부터 이과생이 문과수학(수리‘나’형)을 치르는 게 가능해졌다. 그런데 중상위권 이하의 이과생이 문과수학으로 ‘전향’하면 최소한 2~3등급이 오른다! 대학들은 문과수학을 치르고 이공계열로 지원하는 학생들에게 핸디캡을 얹었지만, 치열한 학생 유치 경쟁의 와중에 그 핸디캡은 ‘전향’을 막기엔 크게 부족한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학생 유치에 걱정이 없는 명문대만이 이과수학을 의무화시켰을 뿐이다. 그래서 최근 이과생은 문과생의 1/2 가량인데, 이과수학 응시자는 문과수학의 1/4에 불과해졌다. 이 와중에 ‘전향한’ 이과생에 더해 진짜 문과생도 일부 이공계열로 진학하게 됐고, 이 두 부류가 ‘미적분 모르는 공대생’이라는 전설(?)의 기원이 된다.
교과 분량이 줄어들고 선택과목이 다양해지는 것은 교육선진화를 위해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주입식 교육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온존한 채로, 더구나 아무런 사회적 합의과정 없이 교육과정과 수능제도를 제멋대로 좌지우지한 결과, 교육당국은 ‘학력 저하 현상은 고교평준화 때문’이라는 부메랑에 정통으로 뒤통수를 맞게 되었다. 일단 ‘쌤통’이다―물론 부메랑의 정체가 흑색선전이라는 사실 또한 정확히 낙인찍어둬야 하겠지만.
이범/와이즈멘토 이사, EBS·곰TV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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