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한승동의 동서횡단
2차대전 때 남방침략에 나선 일본군이 1944년 3월부터 6월 말까지 미얀마(당시 버마)와 인접한 인도 동북부 아삼지방의 임팔 공략에 나섰다. 당시 수세에 몰리고 있던 일본은 임팔 점령을 통한 국면전환을 꾀했다. 임팔은 인도와 버마의 식민종주국 영국 군의 주요 거점으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에 대한 주요 보급기지이기도 했다.
원래 미국과 영국이 일본군과 싸우고 있던 장제스군을 지원한 주요 통로는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베트남 쪽, 곧 인도차이나였으나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고 비시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군은 비시 정권의 협력을 얻어 1940년 9월부터 인도차이나 북부로 진군해 인도차이나 루트를 차단해버렸다. 연합군이 대체 루트로 개발한 것이 버마 루트였고, 일본군은 임팔을 점령함으로써 버마 루트를 끊어 장제스군에 타격을 가하고 연합군의 서남아시아 후방을 교란할 속셈이었다. ‘임팔작전’ 때 일본은 인도 독립운동 세력 일부를 작전에 참여시키는데, 나중에 일본 우파들은 두고두고 이 간계를 전혀 엉뚱한 용도로 우려먹었다. 일본군은 베트남에서도 버마에서도 프랑스나 영국 식민지배에 저항하던 현지 독립운동 세력을 자신들의 침략전쟁에 끌어들여 이용했다. 우파들은 이를 두고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이 아시아민족 해방전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우기고 있다.
임팔작전은 일본군의 궤멸로 끝났다. 투입된 8만6천여명의 일본군 가운데 3만2천여명이 전사하고 4만여명이 병자가 됐으며, 그들 중 상당수가 굶어죽었다. 일본 육군의 와해가 이때 시작됐다.
지난달 27일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자신들의 전략적·경제적 이해 때문에 미얀마 군부 독재정권에 대한 국제적 제재에 반대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중국, 인도, 타이,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접한 버마는 중국 쪽에서 볼 때 벵골만으로 통하고 인도를 견제할 수 있는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이용가치가 높은 자원대국이다.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이나 그루지야의 ‘장미혁명’에 시달린 러시아는 또다시 서방이 지원하는 미얀마의 ‘사프란 혁명’을 경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러시아는 상하이협력기구(SCO) 등을 통해 중국과 함께 미국의 독주에 제동을 걸어왔고, 예전 네윈의 ‘버마식 사회주의’ 때부터 미얀마와 인연이 깊다. 〈워싱턴포스트〉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난했지만, 미얀마와 관계를 확대해온 인도나 미얀마의 최대 교역국인 타이, 한때 최대지원국이었던 일본, 주요 투자국 한국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미국이 중국·러시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버마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얀마에서의 우월적 지위 탈환과 대중국 봉쇄를 위한 전략적 목적에 치중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현대판 임팔작전이라고나 할까.
중국, 러시아가 비판받아 마땅할지라도, 〈워싱턴포스트〉는 이라크, 아프간을 마음대로 유린한 자국 정부부터 먼저 비판해야 하지 않나. 거기에 인권과 민주주의가 있었나.
어쨌거나, 억압은 분쇄되고 미얀마 민중은 비탄에서 해방돼야 한다. 전략적 이해를 떠난 세계시민의 연대가 필요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