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메이데이 때 안보투쟁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회과학연구소 직원조합. 오른쪽 앞이 이시다 다케시 조교수 일가. 왼쪽 끝 양복차림은 이토 다카시 조수. 중앙 뒷쪽 넥타이 차림이 필자다.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⑦ 취직과 안보투쟁 나는 1959년 12월 19세기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운동에 대해 쓴 졸업논문을 문학부 서양사학과에 제출했다. 그와 동시에 도쿄대학 부설 사회과학연구소 조수 모집에 응모해 논문을 제출했고 채용이 결정됐다. 1960년 3월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과학연구소 조수가 됐다. 이 연구소는 전쟁 직후인 46년 8월에 창립됐다. 전쟁중에 금지당했던 ‘사회과학’이란 명칭을 내건 연구소는 ‘평화민주국가 및 문화일본 건설’에 필요한 ‘순수 과학적인 조사연구’를 지향하는 기관으로 설립됐던 것이다. 무교회파 기독자 김교신의 친구로, 전쟁중에는 도쿄대에서 추방당했던 야나이하라 다다오가 소장이 됐고 마르크스주의 법학자 야마노우치 이치로, 마르크스 경제학자 우노 고조 등 전쟁중 대학에서 쫓겨났던 사람들과 폐쇄됐던 경성제대 교수 4명 등이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연구소에선 마르크스주의자의 영향이 강했으나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강좌파와 노농파간의 대립은 연구소 활동에 지장을 주었다. 연구소에는 일본 부문 외에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소련, 중국 등 외국 부문이 개설됐으나 제국주의와 식민지지배 문제나 조선문제를 연구하는 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소련 부문의 경제조수 지위를 얻었다. 2인1실의 연구실을 배당받고 6년 임기 동안 급료를 받아가며 연구할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조수가 되자마자 내가 부닥쳤던 문제가 일본을 뒤흔든 안보투쟁이었다. 51년에 체결된 일-미 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추진한 것은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이었고 A급 전범으로 체포당했다가 회생한 기시 노부스케 총리였다. 60년 1월 마침내 신안보조약이 조인됐다. 사회당과 노동조합연합인 총평이 중심에 서고 공산당이 옵저버로 참가한 안보조약 개정저지 국민회의는 59년 3월에 결성돼 국회청원행진을 되풀이했으나, 분트(공산주의자동맹)가 지도부를 장악한 각 대학 학생자치회 연합체인 전학련은 그런 운동을 ‘분향 데모’라며 급진적인 국회돌입 전술을 주장하면서 대립했다. 국민회의 국회청원행진이 참가자 7만5천명에 이르는 큰 위세를 보여준 게 4월26일이었다. 거기엔 한국에서 4월19일 학생혁명이 일어나고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결국 타도당한 사태전개가 분명히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국민 각층이 운동에 가담하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5월19일 국회에 경비대가 투입되고 회기연장과 신안보조약 채결이 강행됐을 때였다. 내가 존경하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사태에 항의해 도립대학에 사표를 제출했다. 5월24일 교육회관에서 열린 학자문화인 모임에서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 마루야마 마사오가 유명한 강연을 했다. 마루야마는 “안보문제는 19일 밤을 경계로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권력 만능이냐 민주주의냐, 우리는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말하자면 이미 안보에 대해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 됐다는 얘기였다. 다케우치 요시미도 이후 ‘민주주의냐 독재냐’, 민주주의냐 파시즘이냐의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은 기시가 A급 전범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쯤 되면 서울의 학생들처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 노동자들도 있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국민은 ‘기시를 타도하라’며 들고 일어섰다. 도쿄대학도 궐기했다. 5월26일 행동에 나선 도쿄대 직원조합 참가자는 처음 50명에서 300명으로 급증했다. 5월31일에는 도쿄대학 전학 교관연구집회가 열렸고, 가야 세이지 총장을 포함해 300명의 교수들이 참석했다. 마루야마 마사오 강연을 두고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집회 뒤에 남은 사람들은 국회해산·채결백지환원 요구 성명을 내기로 결정했다. 성명은 교수, 조교수, 강사 708명의 서명을 받아 6월4일 발표됐다.
도쿄대 조교수 전체 집회를 알리는 포스터.
6월10일이 되자 이번에는 300명의 대학 직원들이 모여 법학부 교수 강연을 들었다. 이 모임을 조직한 경제학부 사무장은 “모인 사람들이 정숙한 가운데서도 진지하게 나라를 걱정하고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이 넘쳐났다”고 기록했다. 6월10일 그 날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비서 해거티가 일본에 왔다. 대통령 방일 예비조사였다. 해거티는 하네다 공항을 나와 자동차로 도쿄 시내 진입을 강행했으나 데모대에 둘러싸였다. 전학련 반주류파, 공산당계 학생들이 자동차를 마구 흔들어 해거티를 위협했다. 해거티는 헬리콥터로 탈출했다. 이렇게 되자 6월19일로 예정돼 있던 미 대통령 방일을 실현시키려면 자위대를 출동시키는 수밖에 없게 됐다. 기시 총리와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대장상은 아카기 무네노리 방위청장관에게 자위대 출동을 재촉했다. 그러나 아카기는 고민했다. 자위대의 세 막료장들은 출동에 반대했다. 그리고 6월15일이 왔다. 통일행동의 날이었다. 우리 데모대가 국회 남문으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그 동안 전학련 주류파는 남문에서 국회로 돌입해 경찰대와 충돌했으며 그 와중에 도쿄대 문학부 국사학과 4년생 감바 미치코가 숨졌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던 데모대에 도쿄대 여학생이 숨졌다는 소식이 앞쪽으로부터 전달돼왔다. 거기서 연구소 동료들과 상의해 다음날 아침 도쿄대 전체 항의집회를 열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도쿄대로 돌아가 먼저 연구소 교수회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 등에 합의했다. 6월16일 아침 나는 야스다 강당 앞에서 “학생이 살해당했다. 전학 항의집회로 결집하라”고 연달아 외쳤다. 점심 때 강당 앞에서 항의집회가 시작됐다. 같은 시각 9학부 학부장의 요청으로 제2회 전학 교관연구집회가 열렸다. 집회에서 가야 총장은 이른바 가야 성명이라는 걸 낭독했다. “이런 사태 아래서는 대학이 학생교육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득이나 기타 교육적인 방법으로 학생에게 정숙하고 온건한 행동을 요구해봤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면 가능한 한 빨리 헌법의 근본이념에 따라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회복을 꾀하는 외에는 문제해결 방법이 없다. 정치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취지에 입각한 근본적인 해결을 시도해 주기를 강력히 요망하는 바이다.” 6월18일 신안보조약이 자동 성립되는 날 도쿄대에서는 감바 미치코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가야 총장이 조사를 읽었다. 위령제 뒤 정문 앞에 ‘감바 미치코상을 죽음에 이르게 한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한다’고 쓴 커다란 펼침막이 내걸리고 6천~7천명의 교원, 직원, 학생, 대학원생들이 참가한 장례행렬이 시작됐다. 감바 미치코는 공산당을 탈당해 분트 서기국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점에서 교사도 학생도 공산당원도 분트 맹원들도 모두 한마음이었다. 행진은 (도쿄대가 있는) 혼고를 출발해 오후 4시 남문 앞 제단까지 나아갔다. 연도의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여성 한 사람의 죽음이 거대한 정치적 인상을 만들어냈다. 국회 주변에는 국민회의 발표로 33만명, 경시청 발표로는 13만명이 모였다. 그 가운데를 위령행렬이 지나갔다. 위령행렬이 끝난 뒤 남아 있던 교수들이 도쿄대 교수단을 결성했다. 조수는 그것을 지원하기로 했다. 도쿄대 교수단이 한 일은 자치회 리더들에게 자중해줄 것을 요청하고, 농성중인 학생들에게 물과 식사를 넣어주었으며, 경시청에 학생쪽이 그런 상태를 지속하는 한 퇴거명령을 내리지 말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밤 12시, 신안보조약은 1개월 전의 중의원 채택을 근거로 자동 성립됐다. 교수단은 학생의 항의행동 격화를 막으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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