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 석방된 김지하는 3월1일 ‘일본민중에게 보내는 제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뒤인 3월13일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수감됐다. 항의단식과 지원 모금운동 등을 계속해온 일한연대연락회의는 운동의 일환으로 김지하의 일본민중에게 보내는 제안 녹음 테이프 복제본을 팔았다. 이를 위해 일한연대연락회의가 제작한 포스터.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⑪ 민청학련 사건
1974년 6월7일, 일한(한일)연대연락회의는 이틀 전에 시작된 김대중씨의 선거법위반사건 재판에 항의하는 한편 민청학련사건 체포자 석방 요구 데모를 한국대사관 앞에서 벌였다. 이 첫 데모 참가자는 100명이었다. 그 직후 나는 오다 마코토씨에게 얘기해 타이에서 열린 아시아인회의에 참석했다. 나는 김대중씨와 한국민주화운동에 대해 보고했다. 내 얘기가 끝나자 타이인 참가자가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한국인인가?” 그렇게 물은 사람은 타이사회당 서기장 분사농이라고 했다. 몇년 뒤 그는 암살당했다.
내가 타이에서 돌아오자 민청학련사건 재판이 시작됐다. 우리는 민청학련 결성 때 배포된 장시 <민중의 소리> 전문을 입수했다. 그것은 배후조종자로 체포돼 기소당한 시인 김지하씨가 쓴 게 아닐까 생각했다. 6월16일 이 시를 김지하작이라 단정하는 <가디언> 와이만트 기자의 기사가 <요미우리신문>에 실렸기 때문에 일한연대연락회의는 6월21일 기자회견을 열어 전문을 발표했다. 그 시는 한국민중의 분노를 표현하면서 박 정권을 전면적으로 고발하고 규탄하는 선동시였다. 다음날 각 신문들이 기사화했다. <아사히신문>은 ‘김지하씨 작품인가’하는 정도의 기사를 내보냈으나 <요미우리>는 김지하작품으로 단정해 크게 다루었고 <주간 요미우리>는 전문을 실었다.
실은 이 <민중의 소리>는 김지하가 아니라 나중에 인권변호사가 되는,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 조영래씨가 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는 김지하가 쓴 것이라 하여 주목을 받았고, 6월27일 일한연대연락회의가 처음 주최한 집회에서는 배우 사토 히데오씨가 낭독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김지하 작품집은 1971년에 주오고론(중앙공론)사에서 벌써 나와 있었다.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는 당시 이미 그 책을 읽었다. 1972년 <비어> 때문에 체포된 김지하를 후원하기 위해 일본 지식인들이 움직였다. 그때 마산 결핵요양소에 있던 김지하를 찾아간 작가 마쓰기 노부히코씨가 오다 마코토씨와 상담한 결과 오에 겐자부로씨 등이 성명을 내기로 했다. 그 성명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런 와중에 7월9일 김지하를 비롯한 민청학련사건 피고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다음 날 오다, 아오치, 마쓰기, 오에, 쓰루미 슌스케, 히다카 로쿠로씨 등이 모여 재일조선·한국인 작가 김달수, 김석범, 정경모씨 등과 함께 급히 기자회견을 했다.
“<오적> <비어> <구리 이순신> 등의 작품을 통해 그에게 경의의 염을 갖게 된 우리는 이 시인이 극형에 처해지는 데 항의한다”, ‘김지하 등을 돕는 모임’을 만들어 노력하겠다는 성명이 발표됐다. 이미 노엄 촘스키, 장폴 사르트르의 서명도 받아놓고 있었다. 그리고 13일 김지하씨 등에게 사형 판결이 나오자 작가들이 또 모였다. 마쓰기씨가 단식항의를 제안하자 김석범씨가 “마쓰기씨가 하면 우리도 합니다”라며 응수했다.
7월16일 마쓰기씨, 김석범·김시종씨 등의 항의단식이 스키야바시 공원에서 시작됐다. 작가 이회성씨가 달려와 가담했다. 나는 항의단식은 전혀 경험한 바가 없어 쓰쿠마쇼보에서 빌린 텐트속에 다섯명이 들어앉아 실무적인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청년동맹이 다타미와 또 하나의 텐트를 빌려주었다. 어쨌든 도쿄 중심가 공원 한 구석, 쉴새없이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가에 두명의 일본인과 세명의 조선인이 항의단식을 하고 이를 응원하는 젊은이들이 삐라를 뿌리며 서명과 모금활동을 벌이자 사람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김지하 등을 죽이지 마라”는 호소에 사람들은 마음을 열었고 젊은이들이 서명하려고 걸음을 멈췄다.
단식은 19일 끝났으나 사흘간의 모금액은 백만엔이 넘었다. 그날 한국대사관 앞 데모에는 1천명이 참가했다. 이날 일한연대연락회의는 호외 뉴스를 발행했다. 앞면엔 1심 피고와 판결내용을 실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 중에는 이철, 유인태, 인민혁명당 사람들이 들어 있었고 무기징역형을 받은 사람중에는 나중에 서로 알게 된 김효순(<한겨레> 전 편집국장), 서중석(성균관대 교수)씨 이름도 보였다. 뒷면엔 쓰루미 슌스케씨의 글 <김지하, 최초의 말>이 실렸다. 72년 마산에서 만났을 때 김지하가 한 말이 소개됐다. “Your movement cannot help me. But I will add my voice to help your movement.(당신의 운동이 나를 도울 순 없지만 나는 당신의 운동을 돕는 데 내 목소리를 보태겠다)” 이 말은 우리 운동의 정신이 됐다.
7월20일 김지하 등 5명의 피고인들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23일 기자회견에서 아오치 신씨가 민청학련사건 피고의 법정진술 요지를 발표했다. 김지하는 말했다. “유신독재 타도만이 이 민족을 구하는 길이다. 학생들만이 희망이다. …학생운동을 돕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
7월25일 요미우리 홀에서 우리는 ‘김지하 등 모든 피고인들을 석방하라, 죽이지 마라’ 집회를 열었다. 1200명이 들어가는 회장은 만원이었다. 오에 겐자부로씨는 김지하의 시를 두편 낭독했다. 오에씨는 <황톳길> 앞 부분을 10매의 색종이에 써서 우리에게 건네며 그걸 팔아서 운동자금으로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7월27일 스키야바시 공원에서 제2차 항의단식이 시작됐다. 쓰루미 슌스케, 김달수, 미술평론가 하리우 이치로, 역사가 이진희씨가 참여했다. 이번엔 젊은이들이 비에 약한 다타미 대신 발포 스티로폴을 사 주어서 바닥에 깔았다. 노숙자들한테서 배운 지혜였다. 30일 단식이 끝났는데 모금액은 이때도 백만엔에 달했다. 저녁에 ‘조국통일 재일지식인담화회’와 일한연대연락회의 공동주최로 ‘민족시인 김지하의 밤’이 요미우리 홀에서 열렸다. 다시 만원을 이뤘고 쓰루미씨가 “이대로 생애 마지막 날까지 걸어가고 싶다”고 가슴저미는 얘기를 했다.
8월8일은 김대중씨 납치사건 1주년이었다. 그 날 낮 김지하 등을 지원하는 국제위원회 방한단이 1만7000명의 서명 명부를 갖고 출발했다. 단장은 히다카씨였고 노벨상 수상학자인 미국의 조지 월드 교수가 함께 했다. 오후에는 김대중씨가 납치당한 호텔 그랜드팔레스에서 나리타 도모미 사회당위원장, 미야모토 겐지 공산당위원장, 다케이리 요시가쓰 공명당위원장과 아오치 신, 오다 마코토씨 등의 5자회담이 열렸다. 그것은 오다씨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정치범 전원 석방, 대한 원조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공동활동의 첫걸음으로 집회와 데모를 하기로 합의했다. 집회준비 절충작업은 내게 맡겨졌다. 사회당과 공산당의 국민운동 책임자들과 어려운 협의 끝에 9월19일 메이지공원에서 국민 대집회를 열기로 했다. 세 당수와 오다, 아오치씨가 약 3만명의 데모대 선두에 섰다.
그 2개월간의 질풍노도 운동은 베헤이렌 시민운동이 만들어낸 힘이 한국문제라는 새로운 토양에서 꽃을 피운 것이며, 일한연대운동이 운동으로서 이륙할 수 있게 해준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해 연말은 인민혁명당 피고인 7명 문제가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광고주가 (박 정권 압력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동아일보> 지면이 백지상태로 나간데 대한 연대운동도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동아일보> 광고난을 메운 시민의 광고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동아일보> 지원모임이 만들어져 조직적인 신문 구독운동을 벌였다. 일한연대연락회의는 다카사기 소지씨를 강사로 세워 ‘한국어 배워 <동아일보> 시민광고를 직접 읽어보자’는 강좌를 시작했다. 나도 그때 처음 한국어를 배웠다.
1975년 2월에는 김지하 등이 석방됐고 3월1일에는 김지하가 ‘일본민중에게 보내는 제안’을 발표했다. 일한연대연락회의는 그 녹음 테이프를 복제해서 팔았다. 하지만 불과 얼마 뒤인 3월13일 반공법 위반으로 김지하는 다시 체포당했다. 한국정부는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한 김지하의 자필 진술서라는 걸 발표했다. 그리고 4월9일에는 인혁당 관련자 7명을 처형해버렸다. 우리는 연일 가두 항의시위를 벌였다. 일본정부가 234억엔의 경제원조를 하기로 결정한 다음 날 처형이 감행됐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웠다. 18일 항의집회에는 600명이 모였다.
그러던 중 김지하가 옥중에서 쓴 양심선언, 그리고 옥중메모가 일본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그 곤란한 송출작업을 해준 사람은 김정남씨였고, 가톨릭 루트를 통해 빼낸 자료를 접수한 쪽은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 평신도인 재일한국인 실업가 송영순씨였다. 양심선언은 가톨릭 조직이 발표했고 옥중메모는 김지하 작품집 편집자인 중앙공론사 나카이 마리에씨, 후일의 미야타 마리에씨가 받아서 김지하 등을 돕는 모임이 발표했다. 나는 미야타씨를 돕는 한편 가톨릭쪽 기자회견에서 발표를 맡은 송씨를 지원했다.
이때부터 미야타씨와 함께 김지하와 관련한 많은 일을 했다. 나는 대설 <남>의 번역진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했다. 김지하의 영문시집도 간행했다. 다른 한편 송영순씨와는 그가 2004년 여름 서울에서 급사할 때까지 오래 우정과 협력관계를 이어갔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7월16일 마쓰기씨, 김석범·김시종씨 등의 항의단식이 스키야바시 공원에서 시작됐다. 작가 이회성씨가 달려와 가담했다. 나는 항의단식은 전혀 경험한 바가 없어 쓰쿠마쇼보에서 빌린 텐트속에 다섯명이 들어앉아 실무적인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청년동맹이 다타미와 또 하나의 텐트를 빌려주었다. 어쨌든 도쿄 중심가 공원 한 구석, 쉴새없이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가에 두명의 일본인과 세명의 조선인이 항의단식을 하고 이를 응원하는 젊은이들이 삐라를 뿌리며 서명과 모금활동을 벌이자 사람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김지하 등을 죽이지 마라”는 호소에 사람들은 마음을 열었고 젊은이들이 서명하려고 걸음을 멈췄다.
1974년 7월19일에 배포된 일한연대연락회의 뉴스 호외. 오른쪽에 ‘박정희와 다나카 가쿠에이(당시 일본총리)의 살인을 용납하지 마라’는 구호가 보인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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