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각종 야전교범(FM: Field Manual) FM 33-1. 심리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항세력 대처방안에 관한 미육군·미해병대 공동 야전교범’(FM3-24)은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대인관계 등을 망라하는 점령군 행정수칙 같은 문서다. 실제 전투에 관한 내용은 부록에 조금 실려 있을 뿐이다. 각기 다른 전공분야를 공부한 영관급 장교들이 집필한 부분들을 짜깁기한 경영학 개론서와 비슷하다.
‘저항세력’ 규정은 정치학 교과서 베낀듯
전체적 톤은 경영학 개론 짜깁기한듯
‘9대 역설’ 항목은 군당국의 이라크전 원성인듯
전투요령보단 점령군 행정수칙 성격
전체적 톤은 경영학 개론 짜깁기한듯
‘9대 역설’ 항목은 군당국의 이라크전 원성인듯
전투요령보단 점령군 행정수칙 성격
안과 밖 /
동네 편의점에 들렀다가 진열장에 붙어있는 “기부금품 접수 중”이라는 공고문을 보았다. 연말연시 자선 안내문이 아니라 이라크의 미군병사들에게 보낼 위문품을 받고 있다는 공지였다. 기부희망 물품이 나와 있었다. 전쟁터의 미군들이 후방으로부터 어떤 선물을 원할까? 초콜렛부터 컴퓨터 게임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생필품 이야기가 많았다. 양말, 속옷, 타월, 샤워할 때 신을 슬리퍼, 담요, 손전등, 심지어 비누, 치약까지. 갑자기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 다닐 때 ‘전방에 계시는 국군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와 위문품을 보내던 생각이 났다. 세상에서 제일 잘 산다는 나라, 제일 막강하다는 군대의 병사들에게 이런 기초품목이 필요하다니. 그 많던 국방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요즘 미국에 있어보니 전쟁 중이라는 기분을 언제나 느끼며 산다. 전선이 멀리 있다 뿐이지 자기들의 전쟁인 것이다. 신문에서는 매일 전사자 명단이 발표되고 전황에 대한 뉴스가 헤드라인을 떠나지 않는다. 파병을 하긴 했어도 진짜 전쟁터에 군인들을 보냈다는 느낌이 크게 들지 않는 우리와는 딴판이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전쟁을 두 번 치르고 있다. 사담 후세인의 공화국수비대와 붙어서 ‘이겼던’ 1차전, 그리고 지금은 저항세력과 일상적으로 싸우고 있는 2차전이 진행 중이다. 아시다시피 2차전은 보통 의미의 전쟁이 아니다. 적이 누군지, 어떤 목적인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전쟁이다. 정규군끼리 정면으로 맞붙는 대규모 전쟁에 익숙한 미군이 게릴라전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다.
뉴스에서 얼핏 미군이 저항세력을 다루기 위해 새로운 야전교범을 펴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야전교범’ (필드 매뉴얼, FM)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다닐 때 교련선생님이 “FM대로 해!”라고 하신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꾸물대다 혼이 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후론 FM방송도 잘 듣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므로 이 자료를 수소문해서 찾아보았다. 이번 문건은 육군과 해병대가 안을 만들어 지난 6월에 군 내부적으로 회람을 시켰고 10월 말에 최종안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아직 확정승인이 난 것은 아니지만 원안대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0년만에 개정 잔뜩 의미부여
‘저항세력 대처방안에 관한 미육군·미해병대 공동 야전교범’(FM3-24)이라는 이 책자는 240쪽에 달하는 묵직한 문건이다. 나는 야전교범이라 해서 실제로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책인 줄 알았는데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대인관계 등을 망라하는 점령군 행정수칙 같은 문서였다. 실제 전투에 관한 내용은 부록에 조금 실려 있을 뿐이다. 교범을 대략 훑어본 느낌을 말하자면, 관점에 따라서, 이성과 억측, 상식과 넌센스, 통찰과 블랙코미디가 비슷한 정도로 버무려져 있는 공문서라고 보는 게 정답일 것이다. 공무원들이 정색을 하고 한문식 보고문건을 만들어 놓은 것이 한편으로 엄숙한 느낌, 다른 한편 쓴웃음을 자아내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교범은 서문에서 미군이 정규전에 대한 전술교리만 발전시켰지 점령지의 저항세력이 감행하는 비정규전에 대해선 제대로 된 지침이 없었다고 하면서 이번 야전교범이 20년 만에 처음으로 개정되는 중요한 교리임을 강조한다. 이 개념정의에 따르면 ‘저항세력 대처작전’이란 ‘공격, 방어, 안정화 작전의 혼합’이라고 한다. 안정화 작전은 민간안보, 민간통제, 핵심 서비스 제공을 말한다. 따라서 저항세력 대처작전에선 ‘군인들에게 익숙한 전투과제와 민간조직의 기술을 혼합해서 적용’하는 게 필수적이란다. 그러나 익숙한 과제와 그렇지 않은 과제를 잘못 섞어 쓰면 최악의 콤비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단계판매에 손을 댄 대학생을 상상해 보라.
정치학 교과서를 잘못 베낀 듯한 부분도 보인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세력들이 저항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구분한다. 첫째, 정치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는 세력으로서 무정부주의자, 평등주의자, 전통주의자, 다원주의자가 있다. 다원주의자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코자 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둘째, 정치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지 않는 세력으로서 분리주의자, 개혁주의자, 복고주의자, 상업주의자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데만 관심 있는 세력)가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두 저항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이들 말고 또 어떤 다른 정치세력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한참 생각해 보았다. 혹시 그것은 ‘친미주의자들’이 아닐까? 이들만 빼고 나머진 모두 잠재적 저항세력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야전교범의 전체적인 톤은 경영학 개론서와 비슷하다. 그리고 각기 다른 공부를 한 영관급 장교들이 집필한 부분들을 하나로 짜깁기 한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물론 짐작에 불과하지만). 예를 들어 경영대학원에서 매니지먼트 용어를 열심히 익힌 것 같은 A소령은 ‘정보와 기대치를 관리’해야 하고, ‘적재적소에서 영향력 발휘방안’을 강구해야 하며, ‘학습과 적응’을 통해 ‘하부조직에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루하루 전투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한 병사들에게 이런 황당한 지침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보건행정대학원을 갓 졸업한 것 같은 B중령은 열심히 의학적인 은유로 진압작전을 묘사한다. 작전의 첫 단계는 ‘지혈 및 응급조치’와 비슷하고, 중간단계는 ‘입원환자를 회복’시키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으며, 마지막 단계는 ‘집에서 통원치료’하는 것과 같단다. 특히 내 눈길을 끈 부분은 엔지오(NGO)대학원에 다니다 휴학한 것 같은 C대령의 언급이다. ‘NGO는 독립조직이므로 군대와 연관되기를 원치 않는다.’(맞다) 따라서 ‘NGO의 협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지당하다) ‘대다수 NGO는 군대보다 먼저 현지에 들어와 군대보다 더 오래 잔류한다.’(정확하다) 그러므로 ‘군대는 점령지의 NGO를 도와주는 역할에 그쳐야 하고 그들을 압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당연하다)
사선 넘나든 병사 누가 읽을지
새 야전교범에서 저항세력 대처작전에 9가지 ‘대표적인 역설’이 존재한다고 한 부분이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 부분이 이번 교범의 백미다 (1-123절에서 1-132절까지). ① 병력을 보호하려 하면 할수록 더 위험해진다: 주둔캠프 내에만 있으면서 현지인과 접촉을 줄이면 겁에 질려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고 저항세력에게 이니셔티브를 빼앗긴다. ② 무력을 많이 사용할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무력사용은 부수적 피해와 실수 가능성을 높이고 저항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한다. ③ 작전이 성공할수록 군의 효용가치가 떨어진다: 저항세력이 줄면 치안관리를 현지 경찰력에 넘기게 되는데 이랬을 때 역으로 위험이 늘어난다. ④ 무책이 상책일 때도 있다: 저항세력이 일부러 도발해올 경우에는 대응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⑤ 최상의 저항세력 대처방안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경제와 정치가 발전하면 자연히 저항세력은 줄어든다. 달러와 투표가 폭탄과 총알보다 효과적이다. ⑥ 미군이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 좀 허술하더라도 현지정부가 하는 편이 낫다: 점령지의 제도와 지도자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중요하다. ⑦ 오늘 이 곳에서 효과적인 방안이 다음 주 다른 곳에서는 구식이 된다: 저항세력은 상황에 재빨리 적응하므로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⑧ 전술적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투의 승리가 전략적 목표와 연결되지 않으면 전투 자체로는 어떤 결과도 보장되지 않는다. ⑨ 중요한 결정은 장군들이 내리지 않는다: 현장의 병사들이 스스로 현명한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
전략적 목표 잘못 떠넘기는듯
솔직히 말해 미시적으로만 보면 이런 주장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말들이다. 하지만 나는 9대 역설의 핵심이 ⑧번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을 시작하고 끝내는 결정은 정치인이 하는 것이다. 전략적 목표가 정당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을 때 일선에서 죽어나는 쪽은 군인들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⑧번 또는 ⑤번 같은 지침은 야전교범에서 다룰만한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략적 목표는 대통령과 정부가 정하는 것이지 일선의 병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큰 목표가 잘못 되면 그 후에는 아무리 해봐도 제대로 길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이 말은 결국 처음부터 무리하고 불법적인 이라크전쟁에 끌려 들어가 수렁에 빠진 군당국이 자기 정부에 대해 원망하는 소리가 아닐까? 미국에서 제정신 가지고 직업군인 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효제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인권펠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조효제/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인권펠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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