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한승동의 동서횡단 /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자유·행복 추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임을 천명한 미국독립선언에서 말하는 ‘인간’에 흑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흑인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카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다름 아닌 ‘흑인’이다) 철학자 찰스 밀스 일리노이대 교수의 〈인종계약〉(아침이슬)은 근대 이후 세계는 백인들이 지배해왔고, 인간의 보편가치로 떠받들어온 화려한 인간해방 이념들의 수혜자는 백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사회계약’이 아니라 ‘인종계약’이 현실세계 구성원리다. 지금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오늘날 비록 공식적인 탈식민화가 일어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흑인·갈색인·황색인 토착민들이 공직에 앉아 독립국가들을 통치하고는 있지만, 지구경제는 본질적으로 이전의 식민지 열강과 그 후예, 그리고 그들의 국제금융기관, 대출기관, 기업들이 지배하고 있다.(예외는 일본인데, 일본의 역사는 이와 같은 지배에 도전하기보다는 이 지배를 강화시킨다.) … 세계는 본질적으로 백인자본이 지배하고 있다.” 밀스는 또한 “인종은 생물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정치적인 것”이고, “백인 우월성은 실은 결코 피부색이 아니며, 일련의 권력관계”라고도 얘기한다. 그 뚜렷한 사례로 일본을 든다. “미 점령군이 도쿄에 도착하기 몇 주일 전부터 서류들을 필사적으로 불태웠음에도(오늘날 일본 우익들이,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 동원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증거가 될 만한 문서가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런 토대 위에 서 있다) 타지 않고 남은 ‘야마토 인종 중심의 지구정책에 관한 조사’라는 충격적인 문서”가 보여주는 세계지배전략에서 보듯 “모든 민족들은 적절한 상황이 주어지면 백인 우월성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종계약〉의 역자 정범진씨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여러 사회적 범주들 가운데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범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계급·성·인종”이라고 했다. 인간사회의 모순을 계급문제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얘기로 읽힌다. 내셔널리즘(민족주의) 문제도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인들이 “(조)센징”이라 경멸할 때,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들쥐”라 욕할 때 그들 뇌리에 민족보다 계급적 구분이 우선했을까. 세계대전 때의 계급연대라는 게 내셔널리즘 앞에 얼마나 허망했던가.
“전 지구적 백인 우월주의라는 형태로 바깥에서 우리를 향해 밀려들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타자화하고 지배하려는 우리 밖의 인종주의 압력에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물론, … 그 거대한 권력에 매료되어 백인우월주의를 내면화함으로써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점점 그 수가 늘어가는 다른 아시아 국가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과 ‘연변 처녀’ ‘베트남 처녀’들을 인종적 편견에 찬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에게 온갖 불평등과 차별을 강요하는 우리 안의 인종주의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우리는 안고 있다. 이때의 ‘인종주의’를 ‘내셔널리즘(민족주의)’으로 바꿔놔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여전히 지배적 ‘현실’이다. 그게 문제지만, ‘계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계급 환원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만큼이나 공허하다. 저항민족주의는 유효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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