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한승동의 동서횡단 /
독일로 ‘피난’ 온 지 2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한국 지인들과 소통을 끊고 과거와 거의 완벽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왔다. 나에게는 다만 사춘기 딸들을 위해 몸을 바친다는 목표 말고는 아무런 전망도 없었다. 전망이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때로 외로움이 살을 저미는 듯 아프지만 이런 타향의 외로움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떠나오기 전 한국은 나에게 고통의 바다 그 자체였다. 4년 전 나의 삶의 두 기둥, 즉 ‘운동’과 ‘가정’은 한꺼번에 무너졌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무너진 폐허에 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깊은 상처는 아물 줄 모른다.
두어 달 전에 나온 <서준식 옥중서한>(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펴냄) 머리에 서준식(60)씨는 그렇게 썼다. 인권운동사랑방 후배들과의 결별을 그는 “모양새는 결별이지만 사실상 쫓겨난 것”이라고 했고, 그 낭패감은 “지금도 치명적”이라고 했다. 그 시기에 14년을 함께 산 아내도 그를 “버리고 떠났다.”
“19살까지 우리말 한마디도 못하면서 조국을 목마르게 동경”했고 “철이 든 이후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나의 몸에 밴 ‘일본’을 씻어내어 참된 ‘우리나라 사람’이 되는 것이 지상과제”라고 썼던 때가 1987년 5월12일. 그는 그때 16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날조된 ‘학원(서울대) 침투 간첩’이 된 그는 7년 만기를 채우고도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역살이를 10년이나 더 했다. 함께 투옥된 형 서승씨는 2년 더 긴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하지만 치열했던 그 세월도 ‘고통의 바다 그 자체’는 아니었다. 1988년 5월25일 전향하지 않고도 석방된 첫 장기수가 된 이후 20년, 이제 환갑이 된 그를 고통의 바다로 몰아간 건 무엇이었을까.
책은 1989년 <서준식 옥중서간집>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왔으나 2년 만에 ‘절판’시켰다. 오자ㆍ탈자에다 군데군데 원문에서 수십줄씩 빠지거나 배열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1992년 일본어판 <서중식 전옥중서간>을 내면서 많은 부분을 바로잡았다. 2002년 다시 보완한 <서준식 옥중서한>을 야간비행에서 냈으나 3년 만에 절판됐다. 이번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판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추가됐다. 하나는 약 80 항목의 주. 또 하나는 이제까지 수록되지 않았던 미공개 편지 15통 추가. 15통은 1984년 2월부터 1985년 6월까지 어느 목사 부인 및 동행한 젊은 여신도와 예수ㆍ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놓고 첨예한 논전을 벌였던 시기에 그가 그들에게 보낸 22통의 편지 가운데 목사 부인에게 보낸 것이다. “청주보안감호소 시절 가장 중요한 정신활동 중 한 부분”이라고 했다. 서씨는 개인의 불행은 시대의 불행과 맞닿아 있다며 이 시대의 운동가는 특히 불행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세계사적 현대’가 변혁에 대한 기대와 꿈을 잃고 큰 담론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고 한다. 전망이 선 것일까? “인간이란 결국 각자가 몸소 겪은 것만큼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는 거듭 얘기했다. 간접체험일지라도 책을 통해 그의 진실과 외로움의 정체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그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고 한다. 전망이 선 것일까? “인간이란 결국 각자가 몸소 겪은 것만큼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는 거듭 얘기했다. 간접체험일지라도 책을 통해 그의 진실과 외로움의 정체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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