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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리뷰 - 보리스 에이프만 ‘돈 주앙과 몰리에르’

등록 2006-06-04 21:56

고전에 기댄 진부함…진실은 흉내뿐
현대 발레의 젊은 거장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스럽고 비극적이겠지만 현실과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 현대 발레이다.” 사춘기 취향의 동화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을 의식하면서 발레는 활로를 열어갔다. 이때 현재의 삶은 무엇일까. 살아 있음의 신비, 감정의 힘, 그리고 생활세계의 감각 같은 구체적인 진실이다. 아름다움을 위해 억압했던 몸의 진실을 현대 발레 역시 재발견한 것이다.

보리스 에이프만의 〈돈 주앙과 몰리에르〉(5월30~31일 엘지아트센터)는 묘하게 이러한 현대 발레의 흐름에서 비켜나 있다. 1990년대 러시아 발레의 혼돈을 잠재우고 새로운 발레의 가능성을 탐문했던 그로서는 우울한 얘기지만, 그의 안무는 지나치게 공식적이며 패턴화되어 있다. 이 작품만 해도 현실과 환상을 섞으며 욕망 때문에 분열하는 전형적인 개인이 등장하는데, 진부하기 짝이 없다. 몰리에르가 창작의 고통을 드러내는 춤은 끔찍한 연극적 습관에 속할 만큼 과장스럽다. 에이프만은 표현주의를 오해하고 있다. 이야기는 통할지 모르지만, 쥐어짜는 표현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흉내이다. 또한 〈차이코프스키〉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러시안 햄릿〉에서 주인공의 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자기표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동일한 패턴은 전체를 관통한다. 돈 주앙이 뭇 여인들과 추는 파드되(2인무)나 축제처럼 전면을 휘감는 코르 드 발레(군무)는 반복되지만 결국 이야기와 별개로 스펙터클의 전시이다. 볼거리로서의 춤은 기형적이다. 공연을 완성된 작품 전체로서 보기보다 부분적 테크닉을 탐닉하게 한다. 과연 뛰어난 신체조건, 오랜 훈육의 기량은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작품의 생기와 활력은 없다. 그래도 발레는 신체결정론의 세계인가? 테크닉의 향연이면 그냥 만족하는 것인가? 몸짱과 테크닉을 선망하는 태도는 러시아 고전 발레를 맹목적으로 신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서구에서는 이미 청산된 이러한 오류가 우리 발레 관객에게는 만연해 있는 것이 서글프다.

에이프만의 세계는 러시아 고전 발레가 꽃피운 위대한 전통을 색다른 그릇에 담아 팔아먹는 것에 불과하다. 큰 궤적의 춤에 대한 자기도취, 이야기 흐름에 종속되는 현상은 철학 없는 절충주의가 낳은 필연이라고 생각된다. 삶을 현재화하며 고전 발레에서 탈피한 현대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나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와 비교하면, 이는 본질의 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령, 돈 주앙이 지옥으로 떨어질 때의 장면을 보라.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아리아와 함께 뉘우치는 모습이라 의아하다. 돈 주앙은 대지의 삶을 긍정하는 인물인데, 여기서는 형이상학에 굴복한다. 몰리에르가 안다면 지하에서 비웃을 일이다. 문맥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이야기로 해석했기 때문이 아닐까.

〈돈 주앙과 몰리에르〉는 에이프만에겐 예외적인 작품이다.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세계에서 깃털처럼 가벼운 세계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러시안 순혈주의에 가까운 무용수 구성은 남유럽의 익살과 해학을 제대로 담아내기에는 다양성이 부족해 보였다. 그런데도 돈 주앙의 행각과 축제의 시작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몇 발짝 못 가서 본색을 드러냈다. 몰리에르와 돈 주앙이 번갈아 등장하여 예술가의 뻔한 위인전을 쓰고 만 것이다. 세계와의 소박한 접촉을 잃어버린 채, 고전 발레의 허망한 아름다움에 기대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상업주의와 매너리즘은 꼬리가 길다. 에이프만의 시대는 가고 있다.

김남수/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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