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몸짓의 반복’에 담긴 비인간화
억압하기 때문에 반복한다. 프로이트의 말이 옳다면, 정영두의 〈텅 빈 흰 몸〉(5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 가득한 사소한 반복은 습관에 관한 임상보고서다. 실제로 후반부로 넘어가면, 사소한 반복이 갖는 다채로운 차이는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에 척추를 중심으로 거대하게 물결치는 기계적 리듬이 차지한다. 거부할 수 없는 완강한 그 리듬, 그 속도는 몸을 죽일 것만 같다. 비도덕적인 자본주의라도 만난 것일까. 정영두가 겪는 사회는 이처럼 잔혹한 것일까.
〈텅 빈 흰 몸〉의 사소한 반복은 매우 유기적이고 정확하다. 다리를 따라 내려가는 손은 각을 만들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나타나는 사각의 얼굴면에서 눈빛은 예리해진다. 바닥을 구르고 활개를 치면서 돌아나오는 국면은 극진한 표현이며, 차이를 낳는 반복이다. 정영두가 자신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서 작은 몸짓들을 일궈냈음을 증언한다. 사소한 반복은 기계가 되기 이전의 기억이다. 방죽을 형성하는 자갈처럼 지탱해주는 토대로서의 기억. 그런데 어떻게 기억은 기계로 변질된 것일까.
속도의 문제. 사소한 몸짓의 반복은 사소하지 않고, 극진해진다. 반복은 생활과 결부된 리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영두는 춤 이전에 관객에게 전이되는 몸의 감각으로 빛난다. 구체적인 것, 어둡고 깊은 것,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 몸이 가속을 타면서 변이된다. 죽어서야 그칠 것 같은 속도, 비인간화된 속도가 덮친다. 그는 이러한 속도 아래에서 반복이 갖는 긍정적인 가치가 일반적 습관이 갖는 부정적 가치로 넘어가는 무대를 체험시킨다. 그의 무대는 ‘체험-무대’이다.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의 문법에 영향을 받은 듯한 미니멀리즘. 그가 제기한 화두는 독자적이다. 하지만 완전히 푼 것 같지는 않다. 기억과 기계, 그 배면에 깔린 속도의 문제는 문명의 쟁점이기 때문이다. 이때 헝클어진 서사는 문제의식을 모호하게 한다. 가령, 기계적인 춤을 춘 몸이 녹아버린 다음 다시 기능적인 춤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치 앞선 장면들을 부인하는 것 같은 광경이다. 춤으로 관객을 울리는 그의 재능은 소중하다. 하지만 더 많은 휴머니티를 의식하는 정영두로서는 성찰이 좀더 필요한 듯하다.
2006 국제현대무용축제(모다페)는 ‘몸을 통해 상상하는 미래의 문명’이란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에 걸맞은 성취를 얻었는지는 의문이다. 피핑 탐의 〈르 살롱〉은 유럽의 내부 살림살이를 보여주긴 했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인 정공법이었다. 캔두코의 〈여정〉과 〈어리석음을 찬미하여〉는 장애인을 기용했지만, 정체된 영국의 현대무용을 보여줬을 뿐이다. 국외초청작품은 이미 동시대의 감식안에 한참 못미치는 작품성을 자랑했고, 국내초청작품은 대부분 무용계 집안 잔치로 귀착되었다. 모다페는 4년 동안 지속적으로 인접한 예술계와 대중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다시 유명무실한 축제로 환원되고 말았다. 정영두의 〈텅 빈 흰 몸〉을 주목하는 것은 모다페가 아직도 해야 할 구실이 있기 때문이다. 춤은 춤자랑이 아니며, 몸 쓰는 삶 그 자체일 뿐이다.
김남수/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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