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어떤 곳인가
1953년 7월 정전협정 따라
‘군사분계선에서 2km씩 후퇴’
남북, 단독 권한 행사 못해 민간인 출입·개발 제한된 채
물밑에선 치열한 체제경쟁 비무장지대(DMZ)는 한국전쟁이 한반도에서 잉태한 가장 ‘기묘한 공간’으로 꼽힌다. 비무장지대의 설치 근거는 1953년 7월27일 조인된 정전협정 제1조 1항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보면, 비무장지대는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씩 후퇴함으로써 설정된 공간”으로 정의돼 있다. 이곳은 유엔군과 북한·중국군 대표 동수로 이뤄진 군사정전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고, 행정권도 남쪽은 유엔군 사령관, 북쪽은 북한·중국군 사령관이 행사하고 있다. 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지대는 남북 누구의 손도 닿을 수 없는 버려진 공간이 됐지만,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대표적인 공간은 비무장지대 남쪽의 안쪽에 자리한 대성동 마을이다. <한겨레>가 24일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문서 ‘비무장지대 거주민의 원호에 관한 건’에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 내몰려 있던 남쪽 정부의 초조함이 잘 드러나 있다. 1958년 5월 김정렬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국무회의에 보고한 이 문건을 보면 “괴뢰측에서는 이 부락 전면 2㎞지점인 괴뢰측 비무장지대 북한 민간인(1939명)에게 적극적인 제반 원호를 실시하고 있지만 아방측 민간인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하등의 원호 대책이 강구되어 있지 않아 (중략) 국민의 일원이라는 긍지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남북한이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인 탓에 이 지역은 이름과 달리 한반도 어느 지역보다 ‘중무장된’ 지역이 되고 말았다. 비무장지대엔 약 100만개의 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 간의 철책선 거리가 불과 700m밖에 되지 않는 곳도 있고, 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나무와 풀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러 자연을 훼손한 지역도 많다. 비무장지대의 남쪽 부분을 감싸고 있는 것은 민간인 통제선(이하 민통선)이다. 처음 민통선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5~20㎞ 간격으로 설정되었으나, 지역민들의 규제완화 요구로 인해 2007년 12월 현재의 10km까지 북상했다. 현재 민통선 안에 자리 잡은 마을은 서쪽의 대성동 마을부터 동쪽 강원도 양구의 해안면 만대리까지 모두 10여곳이다. 이곳 주민들은 정부가 ‘민통선 북방 유휴지 개발’과 ‘대북괴 심리전 효과 증진’을 위해 1968년부터 조성을 시작한 전략촌 출신들이다. 정부가 비무장지대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8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유엔 연설을 통해 “비무장지대 내에 ‘평화시’를 만들자”고 제안하면서부터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기 비무장지대의 특이한 생태와 문화·역사적 중요성에 눈을 뜨면서 정부는 장관급회담 등을 통해 비무장지대 내 생태환경·역사유적 공동조사·연구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쪽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이 지역의 개발과 보전에 대한 정부의 밑그림은 2011년 7월 확정된 ‘접경지역 발전 종합계획’으로 구체화 되어 있다. 이 안을 보면, 정부는 2030년까지 접경지역 내에 △생태관광 벨트 육성 △저탄소·녹색성장 지역 조성 △동서남북간 교통 인프라 구축 △세계 평화협력 상징공간 조성 등의 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와 별도로 경기도와 강원도 지방자치단체들이 ‘안보 관광’ 또는 ‘평화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크고 작은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운영 중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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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분계선에서 2km씩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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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에선 치열한 체제경쟁 비무장지대(DMZ)는 한국전쟁이 한반도에서 잉태한 가장 ‘기묘한 공간’으로 꼽힌다. 비무장지대의 설치 근거는 1953년 7월27일 조인된 정전협정 제1조 1항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보면, 비무장지대는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씩 후퇴함으로써 설정된 공간”으로 정의돼 있다. 이곳은 유엔군과 북한·중국군 대표 동수로 이뤄진 군사정전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고, 행정권도 남쪽은 유엔군 사령관, 북쪽은 북한·중국군 사령관이 행사하고 있다. 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지대는 남북 누구의 손도 닿을 수 없는 버려진 공간이 됐지만,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대표적인 공간은 비무장지대 남쪽의 안쪽에 자리한 대성동 마을이다. <한겨레>가 24일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문서 ‘비무장지대 거주민의 원호에 관한 건’에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 내몰려 있던 남쪽 정부의 초조함이 잘 드러나 있다. 1958년 5월 김정렬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국무회의에 보고한 이 문건을 보면 “괴뢰측에서는 이 부락 전면 2㎞지점인 괴뢰측 비무장지대 북한 민간인(1939명)에게 적극적인 제반 원호를 실시하고 있지만 아방측 민간인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하등의 원호 대책이 강구되어 있지 않아 (중략) 국민의 일원이라는 긍지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남북한이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인 탓에 이 지역은 이름과 달리 한반도 어느 지역보다 ‘중무장된’ 지역이 되고 말았다. 비무장지대엔 약 100만개의 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 간의 철책선 거리가 불과 700m밖에 되지 않는 곳도 있고, 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나무와 풀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러 자연을 훼손한 지역도 많다. 비무장지대의 남쪽 부분을 감싸고 있는 것은 민간인 통제선(이하 민통선)이다. 처음 민통선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5~20㎞ 간격으로 설정되었으나, 지역민들의 규제완화 요구로 인해 2007년 12월 현재의 10km까지 북상했다. 현재 민통선 안에 자리 잡은 마을은 서쪽의 대성동 마을부터 동쪽 강원도 양구의 해안면 만대리까지 모두 10여곳이다. 이곳 주민들은 정부가 ‘민통선 북방 유휴지 개발’과 ‘대북괴 심리전 효과 증진’을 위해 1968년부터 조성을 시작한 전략촌 출신들이다. 정부가 비무장지대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8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유엔 연설을 통해 “비무장지대 내에 ‘평화시’를 만들자”고 제안하면서부터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기 비무장지대의 특이한 생태와 문화·역사적 중요성에 눈을 뜨면서 정부는 장관급회담 등을 통해 비무장지대 내 생태환경·역사유적 공동조사·연구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쪽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이 지역의 개발과 보전에 대한 정부의 밑그림은 2011년 7월 확정된 ‘접경지역 발전 종합계획’으로 구체화 되어 있다. 이 안을 보면, 정부는 2030년까지 접경지역 내에 △생태관광 벨트 육성 △저탄소·녹색성장 지역 조성 △동서남북간 교통 인프라 구축 △세계 평화협력 상징공간 조성 등의 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와 별도로 경기도와 강원도 지방자치단체들이 ‘안보 관광’ 또는 ‘평화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크고 작은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운영 중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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