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석촌동 고분’. 백제 지배층이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테마가 있는 체험학습 / 몽촌토성·석촌동 고분·아차산성 한강 주변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암사동과 미사리의 선사유적지로 볼 때 기원전 6천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 뒤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한강 주변에 나라를 세우면서 한강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심부를 두루 흐르는 강으로, 너른 평야가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 적합하고 산과 강이 있어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가 유리한 지형적 특징을 갖고 있다. 백제는 온조가 나라를 세운 뒤 개로왕 때까지 약 500년 간 풍요로운 한강 유역을 발판 삼아 성장하였는데 이 시기를 백제의 한성 시대라 한다. 4세기 근초고왕 시절에는 남쪽으로는 전라도 지역을 정복하고 북쪽으로는 평양성을 공격하는 등 정복국가로서 전성기를 누린다. 또 서해안을 건너 중국의 동진과 외교관계를 구축하고 요서 지방에 진출하는 등 한강을 발판으로 한성 백제 전성기를 맞이한다. 지금도 한강 주변에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 백제의 한성 시대를 뒷받침하는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몽촌토성은 성 밖에는 해자를 설치하고 성벽 위에는 목책을 설치해 방어 기능을 한층 강화한 한성 백제의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야산에 진흙을 다져 축조한 것으로 길이가 2.3㎞이며, 성벽의 높이는 6~7m이다. 성의 북쪽 외곽에 물길을 내어 해자를 만들고 성벽 위에 목책을 설치해 북쪽에서 남하하는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몽촌토성에서는 방어시설인 해자, 목책, 성벽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또 백제 시대의 수혈주거지와 저장구덩이 등도 견학할 수 있다. 몽촌토성 안에 있는 몽촌토성역사관에는 뼈로 만든 비늘갑옷, 철제화살촉, 원통형토기조각 등을 전시하고 있다. 원통형토기조각과 중국 서진시대의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 조각 등은 백제 초기부터 일본 및 중국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석촌동 고분은 고구려 계통의 돌무지무덤이 토착민의 흙무덤과 결합하여 새로운 백제의 무덤양식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몽촌토성에서 떨어져 있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돌무지무덤과 흙무덤이 함께 있다. 3호분은 고구려의 장군총과 같은 돌무지무덤으로, 바닥에 흙을 깔고 위에 돌을 층층이 쌓아서 계단 모양으로 축조한 고구려 양식의 무덤이다. 3호분은 규모가 커서 백제 최고 지배층인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4호분은 내부를 흙으로 쌓고 밖에 돌을 쌓아 보강하는 축조 방식을 써 3호분과는 다른 무덤양식을 보인다. 석촌동 고분군을 통해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발 200m의 낮은 산에 축조된 아차산성은 몽촌토성과 함께 백제의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그러나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온 고구려가 점령한 뒤에는, 한강 건너편에 있는 백제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아차산성을 점령한 고구려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봉우리마다 소규모 방어진지인 보루를 설치하였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보루가 15개에 이른다. 아차산성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시대의 성벽, 건물터, 연못터, 온돌 자리와 집수장이 확인되고, 철제무기와 토기도 상당량이 발굴되었다. 서기 475년에 고구려는 백제의 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제의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되고 만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이 한강 가의 도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천도함으로써 백제의 한성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후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던 한강 유역은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중요한 격전지가 된다. 김정주/체험학습연구소 모든학교(schoolall.com)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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