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이 22일 오전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국제회의장에서 퇴진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이 회장의 뒤로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전 에버랜드 사장·맨 왼쪽) 등 삼성 계열사 사장단이 서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전략기획실 해체…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로
이재용씨 국외 근무…6월까지 조처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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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지난 1987년 12월 이병철 회장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회장직을 물려받은 지 20년4개월 만이다.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잠깐 들어 200여명의 취재진으로 가득 찬 회견장을 둘러보는 이 회장의 눈앞에는 지난 20여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듯했다.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의 퇴진을 포함한 경영쇄신안을 22일 발표했다. 삼성그룹 ‘총괄 지휘부’로 통했던 전략기획실은 해체하고,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 등 핵심임원들도 삼성 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로써 삼성은 앞으로 각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로 전환하되, 그룹 차원의 문제는 사장단 협의회에서 풀어가기로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는 최고고객책임자(CCO) 자리에서 물러나 열악한 국외사업장 개척 등을 맡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회장에서 이 전무로 이어지는 경영권 상속·승계 구도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전망이다.
이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 등 그룹 수뇌부와 삼성계열사 사장단은 이날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지하1층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런 내용이 담긴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먼저 이 회장은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다. 이에 따른 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또 국민들에게 “오늘날의 삼성이 있기까지는 무엇보다 국민 여러분과 사회의 도움이 컸다”며 “앞으로 더 아끼고 도와주셔서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워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 회장은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과 등기이사, 문화재단 이사장 등 삼성과 관련한 일체의 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어 이학수 부회장은 삼성이 앞으로 은행업에 진출하지 않을 것임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삼성생명·증권·화재 등 금융 계열사들이 투명성을 높이도록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삼성화재 황태선 사장, 삼성증권 배호원 사장은 차명계좌 등과 관련해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 또 삼성카드가 갖고 있는 에버랜드 주식을 4~5년 안에 매각해 순환출자 구조의 한 고리를 끊겠다고 말했지만,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는 데 대해선 ‘현실적으로 추진하긴 힘들고 앞으로 시간을 두고 검토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이 밖에 △이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도 리움미술관 관장 및 문화재단 이사직을 사임하고 △특검에서 드러난 차명계좌는 관련 세금을 모두 납부한 뒤 나머지를 회장이나 회장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유익한 일’에 사용하며 △삼성과 직무상 연관 있는 인사들은 앞으로 사외이사 선임과정에서 배제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삼성 경영체제의 핵심이었던 전략기획실의 해체에 따라 삼성은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로 전환한다. 이학수 부회장은 “사장단은 협의체일 뿐 의사결정을 하는 기구가 아니고 완전히 독립 계열사들의 이사회와 주총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단, 6월 말까지 법적·제도적 후속조처 마련은 이학수 실장 중심의 전략기획실이 맡게 된다.
스스로 구술했다는 ‘국민들에게 드리는 말씀’을 읽고 퇴장하는 이 회장의 느릿느릿한 걸음엔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사장단들도 회장이 떠날 때까지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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