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바꿔야 산다 ③
여순사건부터 사찰사건까지
수사 은폐·조작 ‘정치검찰’ 역할
‘물라면 물고 말라면 안 물뿐’ 진실화해위 재심 사건도 상고
현실과 다른 판단으로 ‘눈총’ 대법원도 과거 판결 사과하는데
검찰은 ‘의욕이 부른 불상사’ 치부 한상대 전 검찰총장이 검찰 간부들과 일선 검사들의 유례없는 사퇴 요구로 물러난 뒤 검찰 내부에서도 개혁의 핵심 과제로 ‘정치적 독립성’을 꼽고 있다. 하지만 ‘정치검찰’은 이명박 정권이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검찰은 줄곧 권력에 기생해 국민과 법 위에 군림해왔다. 그럼에도 검찰은 이제까지 단 한번도 ‘정치검찰’의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한 일이 없다. ■ ‘정치검찰’의 오랜 역사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좌익 소탕작전을 핑계로 경찰이 나무꾼을 사살하는 일이 일어나자 광주지검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는 해당 경찰관을 기소해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이 사건으로 박 검사를 ‘좌익검사’로 낙인찍은 경찰은 여순사건 경찰토벌대를 통해 박 검사를 체포한 뒤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했다. 동료 검사가 재판도 없이 살해당했지만, 이승만 정권의 눈치만 살피던 검찰은 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고, 이후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범죄를 눈앞에 두고도 정권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검찰의 나쁜 습성은 검찰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검찰은 1961년 거창 민간인 학살 유족회 사건,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1968년 태영호 납북어부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에서 경찰·중앙정보부와 함께 사건 조작과 사법살인에 가담해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1987년 1월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는 최근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의 실제 주인공인 김근태 민청련 의장을 고문한 경찰들을 검찰에 고발했지만 서울지검은 무혐의 결정을 했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을 땐 가해 경찰관을 기소유예하면서 “급진좌파 사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하여 가출한 자가 성적 모욕이라는 허위사실을 날조 왜곡해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라는 허위 보도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지만 검찰의 인식 수준은 군사독재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 12·12 군사 쿠데타의 피해자들이 1993년 7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고소했지만, 검찰은 기소유예였다. “14년간 우리나라를 통치하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과거에 집착하여 미래를 그르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아니하며” 등 갖은 미사여구를 들이댔다. 오직 법률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수사해야 할 검찰이 스스로 ‘정치검찰’임을 드러냈다. 당시 이 사건을 맡은 장윤석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은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올해 3선에 성공했다. 불과 2년 뒤 5·18 특별법이 제정되자 검찰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구속 기소했고,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이 확정됐다. 이즈음 검찰 안에선 “우리는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무는 개”라는 자조가 터져나왔다.
■ 반성커녕 “잘못 없다” 아집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경찰·국가정보원·군 등 권력기관들은 과거사위원회를 꾸려 과거의 잘못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작업에 들어갔지만 검찰만은 예외였다.
사법부도 2008년 9월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의 사법부 60주년 기념사를 통해 “과거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해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드린 데 대해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한 달 뒤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은 “국법 질서의 확립이나 사회정의의 실현에 치우친 나머지 국민의 인권을 최대한 지켜내야 한다는 소임에 더 충실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고 수사 결과에 대한 의욕이 지나쳐 절차의 적법성과 적정성을 소홀히 한 적도 있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사건 조작을 통한 사법살인과 인권침해에 관여한 검찰의 과거를 ‘의욕이 앞서 발생한 불상사’로 치부하자,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심지어 검찰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등의 조사로 고문 등에 의한 조작 사실이 드러나 법원이 재심을 결정한 사건에서도 줄곧 피해자들의 유죄를 주장했다. 이런 관행은 이명박 정부 들어 더욱 심해졌다.
2010년 12월 한국전쟁 때 학살된 민간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유족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김하종(78)씨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검찰은 법원에 항소이유서를 냈다. “이적성 여부는 당시 시대 상황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1960년대 행위를 현재 시대 상황에서 이뤄진 것으로 가정하고 이적성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게 검찰의 항소 취지였다. “유족회 위령제가 북한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는 재심 판결이 “현재 상황을 기초로 판단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논리였다.
검찰은 앞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했다’는 죄로 1983년에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가 27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최양준(73)씨 사건도 항소했다. “‘임의동행 후 구속’은 당시 수사관행으로 보이고, 원심 법원이 최씨의 가혹행위 주장을 배척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이미 수사기관의 폭력과 사건 조작 등의 증거가 드러났는데도 ‘당시 법원이 가혹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며 유죄 논리를 편 것이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기 상임위원을 지낸 검찰 출신 김희수 변호사는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하고 상명하복 체제로 조직 내 비민주적 문화가 팽배한 검찰의 특성으로 볼 때, 자체적으로 과거를 반성하거나 개혁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외부로부터의 강제적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수사 은폐·조작 ‘정치검찰’ 역할
‘물라면 물고 말라면 안 물뿐’ 진실화해위 재심 사건도 상고
현실과 다른 판단으로 ‘눈총’ 대법원도 과거 판결 사과하는데
검찰은 ‘의욕이 부른 불상사’ 치부 한상대 전 검찰총장이 검찰 간부들과 일선 검사들의 유례없는 사퇴 요구로 물러난 뒤 검찰 내부에서도 개혁의 핵심 과제로 ‘정치적 독립성’을 꼽고 있다. 하지만 ‘정치검찰’은 이명박 정권이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검찰은 줄곧 권력에 기생해 국민과 법 위에 군림해왔다. 그럼에도 검찰은 이제까지 단 한번도 ‘정치검찰’의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한 일이 없다. ■ ‘정치검찰’의 오랜 역사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좌익 소탕작전을 핑계로 경찰이 나무꾼을 사살하는 일이 일어나자 광주지검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는 해당 경찰관을 기소해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이 사건으로 박 검사를 ‘좌익검사’로 낙인찍은 경찰은 여순사건 경찰토벌대를 통해 박 검사를 체포한 뒤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했다. 동료 검사가 재판도 없이 살해당했지만, 이승만 정권의 눈치만 살피던 검찰은 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고, 이후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범죄를 눈앞에 두고도 정권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검찰의 나쁜 습성은 검찰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검찰은 1961년 거창 민간인 학살 유족회 사건,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1968년 태영호 납북어부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에서 경찰·중앙정보부와 함께 사건 조작과 사법살인에 가담해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1987년 1월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는 최근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의 실제 주인공인 김근태 민청련 의장을 고문한 경찰들을 검찰에 고발했지만 서울지검은 무혐의 결정을 했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을 땐 가해 경찰관을 기소유예하면서 “급진좌파 사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하여 가출한 자가 성적 모욕이라는 허위사실을 날조 왜곡해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라는 허위 보도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지만 검찰의 인식 수준은 군사독재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 12·12 군사 쿠데타의 피해자들이 1993년 7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고소했지만, 검찰은 기소유예였다. “14년간 우리나라를 통치하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과거에 집착하여 미래를 그르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아니하며” 등 갖은 미사여구를 들이댔다. 오직 법률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수사해야 할 검찰이 스스로 ‘정치검찰’임을 드러냈다. 당시 이 사건을 맡은 장윤석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은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올해 3선에 성공했다. 불과 2년 뒤 5·18 특별법이 제정되자 검찰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구속 기소했고,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이 확정됐다. 이즈음 검찰 안에선 “우리는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무는 개”라는 자조가 터져나왔다.
한상대 전 검찰총장(앞줄 오른쪽 등 보이는 이)이 3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퇴임식을 마치고 떠나며 환송하는 직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