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
‘하이서울’(Hi! Seoul)은 2002년 제정 당시부터 문제점이 지적된 서울특별시의 공식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우선 서울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상의 정체성과 장점을 압축해 표현함으로써 가치를 높여야 하는 슬로건으로는 자격 미달이다. 서울에게 인사할 것을 방문객에게 요구하는 식이어서 무례해 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서울이 스스로 인사하는 자기만족적 구호 같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이서울 브랜드’는 정착한 듯하다. 한국생산성본부는 지난해 이 브랜드의 자산가치를 106억원으로 평가했다. 콩글리시까지 상품화하는 한국인의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는 듯해 씁쓸하다.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 영어 몰입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영어 콤플렉스의 표출 수준이 훨씬 높아진 셈이다. 덕분에 국민들의 영어 스트레스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정부의 이런 섣부른 행태는 오히려 외부 문화에 대한 이해 능력을 왜곡시켜 한국 문화의 성숙을 가로막을 위험성이 크다.
영문학자인 이재호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문화의 오역〉(도서출판 동인 펴냄)에서, 그리스·로마 신화와 관련된 번역서를 예로 들며 오역의 절대 다수는 ‘문화의 오역’이라고 말한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원문에서 번역한 책이 별로 없다. 대부분 영어나 일본어를 통한 중역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상당 부분은 ‘문화적 콩글리시’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사실 불경과 성서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런 오역은 간단한 영어 문장에서도 나타난다. ‘가을의 전설’로 번역된 영화 제목 ’Legends of the Fall’은 ‘가을의 전설’이 아니라 ‘타락의 전설’이라고 해야 옳다. ‘River of No Return’ 역시 ‘돌아오지 않는 강’이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강’이 맞다. 강이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람이 가면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다. 노래 제목 ‘Waltzing Matilda’는 ‘춤추는 마틸다’가 아닌 ‘배낭 유랑’이다. ‘waltzing’은 ‘walking’의 방언이며 ‘matilda’는 ‘보따리’를 뜻한다. 〈서양의 지혜〉(버트런트 러셀 지음)의 머리말에 나오는 ‘A great book is a great evil’을 ‘위대한 저서는 죄악이다’, ‘위대한 저작 치고 엄청난 악이 아닌 게 없다’라고 번역한 것은 그야말로 죄악이다. ‘두꺼운 책은 버겁다’, ‘책이 두꺼우면 독자에게 고통을 준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오역이란 우리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문화 자체의 왜곡 과정이다. 아무리 앞선 문화를 수입해도 핵심을 정확하게 잡지 못하면 양쪽 문화 모두 왜곡된다. 문화 이해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수입 문화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한국 문화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이서울’이 그렇듯이 오인과 오해에서도 새로운 질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우물 안 개구리’식 만족에 머문다. 지적 성숙보다 속도를 중시하는 몰아붙이기식 영어교육 정책이 문화 오역을 더 심화시키지 않을지 걱정된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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