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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독배’로 항거한 튜링의 정신

등록 2008-04-04 21:41

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1912~54)은 동성애 혐의로 집행유예 판결과 함께 여성 호르몬 투여를 명령받는다. 이로 인해 그는 중추신경 계통 손상 등 신체 변화를 겪는다. 그는 결국 ‘마녀가 준 독사과를 먹은 백설공주처럼 죽음을 택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는다.

튜링은 컴퓨터와 인공지능 분야의 선구자로, 그의 이름을 딴 ‘튜링 테스트’라는 게 있다. 사람이 장막을 사이에 두고 누군가와 대화한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것이 기계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 기계는 사람과 같은 지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후 사람의 마음을 정의하는 데 이 방식을 적용한다.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사람의 몸은 컴퓨터 하드웨어, 마음은 소프트웨어에 비유된다.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이 비유는 많은 이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마음을 소프트웨어로 보는 시각은 세련된 형태의 유물론이다. 마음이 뭔지를 내부에서 살피는 대신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놓고 판단하는 기능주의적 접근 방식이다. 물질(뇌)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정신(마음)을 해명하되, 그렇게 해서 설명되지 않는 마음의 많은 부분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세련됐다고 하는 이유는, 이전의 어떤 접근 방식보다 분명한 실험 결과를 내놓는 데 있다.

이런 유물론적 접근은 현실에서도 갈수록 세를 얻고 있다. 사람은 물질적 욕구의 담지자로 단순화되고 사람의 가치는 화폐의 양으로 측정된다. 교육 또한 욕구 충족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타산적 인간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된다. 시험성적은 이 틀에 얼마나 들어맞는지를 판정하는 핵심 수단이다. 말 그대로, 마음은 좋은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끝없이 계산하는 소프트웨어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진짜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마음은 디지털 계산으로 파악할 수 없는 많은 내용을 갖고 있다. 마음 연구 전문가인 존 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마음이 뭔지 알려면 정신-물질 이원론과 유물론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마인드>(까치 펴냄)에서 말한다. 심적인 것은 두뇌 물리구조의 특징이지만, 1인칭 존재론을 가지는 의식(마음)은 3인칭 존재론을 가지는 어떤 것(물질ㆍ소프트웨어)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곧 정신은 필연성의 세계인 물질에서 생겨나 물질과 상호작용하지만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독자 영역을 구축한다. 지향성과 자유의지, 책임과 도덕성, 자아 정체성 등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마음의 핵심 부분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발달한다. 이를 도외시하고 드러난 것만 갖고 따져서는 마음의 상실을 부추길 뿐이다.

튜링이 여성 호르몬 투여를 명령받은 것은 그가 물질로 취급당했음을 뜻한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죽음으로 저항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마음을 물질로 떨어뜨리고 있다. 미국 컴퓨터회사 애플은 먹다 남은 사과를 회사 로고로 택함으로써 튜링을 되살렸지만, 물질에 대한 저항 의지조차 잃어가는 현대인의 마음은 누가 살려줄까.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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