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안데르센 프로젝트’
[리뷰] 안데르센 프로젝트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연극이나 일인극은 그동안 좀 부담스러웠다. 살아있는 인간의 예술인 연극에 멀티미디어가 침입하면 연극 고유의 정체성이 흔들릴 것 같고, 배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관객을 설득해야 하는 일인극의 경우엔 그 화사한 연기술에 압도되어 배우만 남고 연극은 사라지는 듯했으니까.
그런데 이 부정적인 인식을 철회할 때가 된 것 같다. 멀티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연극, 로베르 르파주가 연출하고 이브 자크가 출연한 일인극 〈안데르센 프로젝트〉(엘지아트센터 7~9일)가 기묘한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연극은 첨단 기술에 주눅 드는 대신 멀티미디어라는 신발을 신고 종횡무진 달렸고, 무수한 역할 변신에도 배우는 과잉연기의 유혹을 자제하며 작품의 주제인 인간의 고독을 부각시켰다.
한평생 동정으로 살았던 고독하고 못생긴 안데르센, 애인과 헤어지고 파리에서 안데르센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가 제작자에게도 버림받는 캐나다 작가, 포르노 쇼장이나 청소하고 그래피티나 일삼는 모로코 이민자 청년, 바람난 아내에 대한 상처로 핍쇼에 중독된 제작자. 이브 자크가 표현하는 모든 인물은 철저하게 고독한 단자였고, 일인극을 수행하는 그 역시 고독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무대에서 홀로 〈안데르센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저 넓은 무대 위에 오로지 그 혼자서.
연출을 맡은 르파주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의 장기인 테크놀로지를 동원하면서도 현란한 마술에 빠져들지 않았다. 왜? 속도와 현란함은 고독을 증발시킬 테니까. 대신 그는 전화 부스 같은 쓸쓸한 핍쇼를 배경으로 현대인의 욕망과 고독을 천천히 더듬고, 시간을 초월해 안데르센에게 다가가 고독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동화와 현실을 오고가며 그 고독이 어떻게 예술로 표출되는지 고민하였다. 이따금 아름답고 절제된 영상으로 시공을 오고가며, 때론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지해서 소박한 그림자만으로 안데르센의 동화를 박진감 있게 표현하면서.
덕분에 공연은 끝났지만 작품이 던져준 고독한 여운이 며칠째 나를 따라다닌다. 하긴 그러고 보니 나도 자주 혼자다. 혼자 밥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세상 사람들과 만날 때도 자주 혼자라고 느낀다. 그 고립감을 재확인하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무대 위의 그들 역시 나와 같다는 연민에 가슴 한쪽이 뭉클해진다. 나무 뒤를 천천히 스쳐지나가던 안데르센이 모로코계 청년으로, 제작자로 바뀌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고독에 관한 한 우리 모두 하나인 것이다. 최근에 로베르 르파주는 유럽 연극상을 받았다. 시상식장에서 그는 연극이 우리 시대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마지막 화합의 장이라고 말했단다. 나도 그것을 믿는다. 연극의 가능성, 치유와 화합의 장.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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