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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하루키회고록] 김대중을 죽이지 마

등록 2006-10-19 18:58수정 2007-03-29 17:57

계엄사 ‘내란음모’ 중간수사발표는 살의에 가득찼다.
도코 곳곳에서 구명 서명운동, 촛불시위를 계속했다.
한국국민과 연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했다.
사형 확정 뒤 김대중씨가 감형됐다. 인간의 승리였다.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⑬ 소련 생활뒤 목도한 한국의 쿠데타

나는 1년간 소련에 머문 뒤 1979년 10월23일 일본으로 돌아왔다. 사흘 뒤 텔레비전은 한국 박정희 대통령이 KCIA(중앙정보부) 부장한테 사살당했다는 경천동지할 뉴스를 전했다.

그 뒤 한국 정치정세는 서서히 정상화돼갔다. 1980년 2월에 김대중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복권했다. 3월26일 김대중씨는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3김씨가 모두 정치활동을 재개하고, 4월에는 김대중씨가 수만명의 군중집회에서 연설했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김종필씨가 한국에 ‘행정의 시대’가 가고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 말을 듣고 기뻤다.

하지만 봄에는 역풍이 불었다. 1980년 5월17일 한국에서 전두환 장군 쿠데타가 일어났다. 김대중씨가 군인들한테 연행당했고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5월20일 광주 학생 시민 데모대가 쿠데타군에 저항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오치 신씨는 감기가 덧나 입원하고 있었다. 시미즈 도모히사, 구라쓰카 다이라 두 분과 상의해 지식인 15명의 항의성명을 5월23일 냈다. 쓰루미 슌스케, 오에 겐자부로씨도 동석해 주었다. 27일 ‘자유 광주’는 진압당했다. 나는 소감을 <세카이> 7월호에 썼다.

5월22일 발표된 계엄사령부의 ‘김대중 수사 중간발표’는, 원래 공산주의자로 국외에서 북한계 인사와 손잡고 북한에 동조하는 언사를 내뱉은 김대중씨는 집권욕에 사로잡혀 학생들을 선동하고 내란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명백히 살의에 가득찬 발표였다. ‘김대중씨의 불투명한 부분’이라는 괴문서가 도쿄에서 나돌아 <산케이신문> 시바타 미노루 기자가 그걸 이용해 김대중씨는 공산주의자였다, 극형을 피할 수 없다는 캠페인을 6월 초 <산케이신문>과 <주오고론(중앙공론)>을 통해 폈다. 같은 시기 <아사히신문> 전 기자 다나카 아키라씨가 <아사히신문> 석간에 글을 써서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주장했다.(6월5일 석간) <마이니치신문>에는 시게무라 도시미쓰씨가 광주사건에 대해 ‘권세욕 강한 정치풍토- 비극의 온상은 여기에’라는 글을 썼다. 모두 쿠데타와 김대중씨의 체포가 필연적이라 보는 시각이었다. 나는 시바타씨의 캠페인과 다나카, 시게무라씨의 정치문화론에 토대를 둔 쿠데타 정당화론을 모두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스에 료스케씨와 상의한 뒤 <세카이> 8월호에 ‘김대중씨 말살 음모와 가담자들’이라는 논문을 썼다.

7월5일 아오치씨와 나, 히다카 로쿠로씨와 NCC(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 쇼지 쓰토무 목사는 외무성 다카시마 마스로 차관을 만났다. 아오치씨가 김대중씨 고발이 1973년 납치사건 정치결착에 위반되지 않느냐고 다그치자 다카시마 차관은 할 말이 없어 답변하지 못했다. 거기에 분명히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우리는 그 점을 붙들고 늘어졌다. 7월10일 집회에서 ‘김대중씨를 죽이지 마라’는 시민서명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오치씨와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의 나카지마 마사아키 목사, 이치카와 후사에 참의원의원 3명이 제창했다. 호소는 신문 텔레비전에서도 널리 다뤄져 학생과 시민이 끊임없이 다카다노바바에 임대한 자그마한 사무소를 찾아와 운동 참가신청을 냈다. 도쿄 여기저기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군법회의가 시작된 것은 8월14일이었다. 문익환 목사, 고은씨, 이문영 교수, 조성우, 이신범, 이해찬씨 등 학생들이 김대중씨와 함께 법정에 끌려나왔다. 9월1일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이 되는데, 그 직전에 나온 <쇼쿤(제군)> 10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김대중이라는 인물은 한국의 민주발전을 위해서도,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그리고 국민 도의심을 위해서도, …큰 방해요소, 독소라 할 존재다”고 말했다. 9월17일 1심판결은 김대중씨 사형이었다.


일본 외무성은 판결문을 한국정부로부터 건네받지 못하고 간단한 판결이유요지만 손에 넣었을 뿐이다. 적용법조는 기소장대로라고만 돼 있고 사형판결 근거가 은폐돼 있었다. 결국 내란음모죄목으로는 사형이 적용되지 못했고, 일본정부와 정치적 결착을 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반국가단체, 한민통 일본본부의장에 취임한 것이 국가보안법위반이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서울에 납치된 뒤 의장직을 그만두고 싶다고 도쿄 한민통에 연락한 것 등을 이유로 사형판결을 내린 꼴이 됐다. 실로 무책임한 엉터리 판결이었다.

운동은 계속 고조되고 있었으나 11월3일 제2심 사형판결이 나올 무렵이 한계에 부닥쳤다는 느낌이 가장 강한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교토에 있는 대학에 강연을 나가 쓰루미 슌스케씨와 만났다. 일본국민 다수가 김대중씨 구명을 바란다는 강한 인상을 일본정부에 주어서 중대 결의로 한국정부를 설득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를 했다. 쓰루미씨는 그렇다면 일본의 국민적 작가 몇명에게 총리, 외상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좋은 안이었다. 오에 겐자부로씨는 이미 우리에게 집회에서 몇번이나 얘기해주었다. 그리하여 시바 료타로씨에게 쓰루미씨가 얘기하고, 마쓰모토 세이쵸씨에게는 아오치씨가 얘기하기로 합의했다. 작가들은 부탁을 들어주었다. 11월30일 구와나 교회에 강연을 갔을 때 교토까지 가서 쓰루미씨한테서 시바씨 편지를 받아 왔다. 또 한사람의 작가 편지는 내가 받아서 12월1일 이토 외무대신 앞으로 3명의 작가 편지를 부쳤다.

11월29일에는 사회당위원장과 총평 사무국장이 스즈키 젠코 총리를 만나는데 아오치씨와 나도 동석시켜 주었다. 우리는 판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형판결이 납치사건의 정치적 결착에 위배되는 것임을 강하게 지적했다. 11월21일 한국대사에게 ‘중대한 관심과 우려’를 전달한 총리는 “최후의 최후까지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노력해가겠다”고 대답했다. 12월3일 서울에서 스즈키 총리 인형을 불태웠다.

그때 레이건 차기 미 대통령이 서울에 특사를 보냈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12월은 운동의 클라이맥스였다. 12월10~11일에는 국제문화회관에서 김대중씨의 생명을 우려하는 긴급국제회의가 열렸다. 기독자의 국제적 연대가 살아난 회의였고, 미국에서는 전 국무부 한국부장 레이너드씨 등이 참가했으며 일본에서는 전 법무상 다나카 이사지씨가 참가했다. 12월17일은 스미야 미키오 도쿄여자대학장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전국 72개 대학학장 성명을 발표했다. 김대중씨에 대한 극형을 막도록 일본정부에 요청하고 이문영 고려대 교수 석방을 요구했다. 12월22일은 노동조합 중심의 ‘김대중씨 죽이지 마 일본연락회의’의 그 달 두번째 데모가 열려 찬바람속에서도 1만명이 참가했다. 우리는 12월24일 ‘김대중씨를 위한 크리스마스’ 집회와 촛불시위를 했다. 나는 안병무씨의 글 ‘미래를 위한 크리스마스’를 인용해 “김대중에게 크리스마스를”이라고 외쳤다.

‘김대중씨를 죽이지 마’라는 외침은 글자그대로 일본 전역에서 터져나왔다. 어느 부인은 “저토록 훌륭한 사람이 가엽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 사람이 7년 전 일본의 호텔에서 납치당해 해상에서 살해당할 뻔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카다노바바 역전 선술집의 젊은 주인이 서명운동에서 돌아온 우리들에게 5천엔짜리 지폐를 건네며 “나는 그 사람을 믿습니다”라고 외치듯 말한 걸 잊을 수 없다.

1981년 1월23일 한국 대법원은 김대중씨 등의 상고를 기각하고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선고를 확정했다. 한 시간 뒤 각의결정으로 김대중씨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월30일 우리는 보고집회를 열었다. 그 결의문에 나는 이렇게 썼다.

“전두환 정권은 전세계에서 터져나온 ‘죽이지 마’ 함성 앞에, 일본국민 다수가 참여한 그 함성 앞에, 한국국내의 소리없는 민(民)의 소리 앞에, 그 함성 때문에 움직인 각국 정부의 압력속에 마침내 김대중씨 살해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승리라고 부르자. 인간의 승리라고 부르자.”

우리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작은 것이며, 힘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어떠한 환상도 갖지 않고, 결코 오만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다른 무수한 사람들의 노력과 어떻게 엮어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특히 우리는 한국 국민이 김대중씨를 죽이지 마라는 소리없는 소리를 내지르고 있으며, 거기에 연대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했다. 동시에 우리는 설정한 목표, 김대중씨를 죽이지 못하게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책임을 지고자 했다.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운동 동료들은 조직 이름을 바꾸고 김대중씨가 석방돼 미국으로 출국할 때까지 운동을 계속한 뒤 83년 4월 해산했다.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회사원 노릇을 그만두고 서울에 유학해서 한국어를 배운 뒤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가 한국문학 연구자가 됐으며, 지금은 와세다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호테이 도시히로씨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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