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파레이와 브루스 커밍스(가운데), 그리고 커밍스의 딸. 1984년 두 번째로 미국에 갔을 때 시애틀에서 찍은 사진이다.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⑭ 북한 연구를 하게 된 연유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하고 있던 우리 그룹은 일본에 유학중이던 남베트남 학생 반전·반정부그룹과 알게 됐다. 그들은 남베트남 정부를 부정하고 그 여권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일본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도록 운동하고 응원했다. 나는 그 학생들 중 한명한테서 베트남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 운동 동지 일본여자대 교수 시미즈 도모히사는 미국사 전문가였기 때문에 미국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하는 것은 “취미와 실익이 일치”한다고 얘기했다. 나는 러시아사가 전문이어서 베트남전쟁 반대 시민운동을 전문 연구분야와 연계시키기는 어려웠다. 어학에 취미가 있는 나로서도 베트남어는 어렵고 도무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호무나이’(오늘)이라는 단어뿐이다. 나중에 베트남전쟁이 1975년에 끝났을 때 유학생들은 축하행사를 벌였다. 그날 한 연설중에 ‘호무나이’라는 말이 몇번이나 되풀이되는 걸 듣고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으나 베트남어 이해력이 그 정도였으니 베트남전쟁에 대한 관심을 전문 역사연구로 살려내지 못하고 만 것은 당연했다.
한국 민주화운동과 연대하던 중 나는 한국어를 배워 번역까지 하게 된 것은 이미 얘기했다. 일본에서 역사가로 살아가겠다면 일본과 조선 관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었고 ‘취미와 실익’론을 생각하더라도 한국의 운동에 대한 관심, 한국어 지식을 역사연구와 엮어가는 것은 의무이기도 했고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러시아와 베트남은 북쪽과 남쪽으로 방위가 달랐지만 조선은 일본에서 러시아를 바라보면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일본과 러시아 관계는, 일본과 조선과 러시아 관계였다. 러일전쟁이 바로 이런 3국의 운명적인 연계를 보여준다.
나는 베트남전쟁 말기인 1973년에 첫 책 <니콜라이 러셀- 국경을 넘은 나로드니키> 상·하 2권을 출판했다. 이것은 러시아 나로드니키 혁명가로 젊은 나이에 망명해서 루마니아, 불가리아, 미국 본토, 하와이에서 살았으나, 러일전쟁 때 일본에 억류당한 러시아인 포로에게 혁명을 선전하기 위해 일본에 온 인물의 전기다. 일본에서 미군들에게 반전을 호소하고 합법적으로 제대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가르치는 카운셀링을 해주기 위해 일본에 온 미국인 영 익스와 알게 된 것이 그 전기를 쓰게 된 처음 동기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 책 속에서 일본과 조선과 러시아 관계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논했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현대사는 자연히 만나게 된 테마였다. 더욱이 3·1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1976년에 논문 <비폭력혁명과 억압민족>을 썼다. 김지하의 호소를 듣고 일본인과 3·1독립선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 그 논문을 담은 내 첫 평론집 <한국민중을 주시할 것>은 1981년에 간행됐다. 그러나 나는 한국현대사도 3·1운동연구도 아닌 북한사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역시 나는 한국 군사정권한테서 위험인물 취급을 당해 한국 입국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한국사연구에는 본질적인 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역으로 러시아사연구의 토대를 활용한다면 소련 점령하에 있던 북한을 연구하는 게 더 의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1980년대 초에 북한사연구를 시작한 것은 북한을 알고 싶으나 무엇 하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해 알아야 할 사정이 80년대 초에 강력하게 대두했다. 81년 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첫 손님으로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은 태평양에서 일본과 미국의 방위를 위한 방파제”라고 연설했다. 82년 말 나카소네 야스히로 새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한일동맹과 40억달러 원조를 자청했다. 대항할 상대는 소련과 북한이었다.
60년대 중반 한일조약 체결 전까지는 사회주의국 북한을 대충 이해할 수 있는 나라로 생각해왔으나 80년 전후가 되면 이미 북한은 통상적인 소련형 사회주의와는 다른 체제의 국가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현재 문헌은 모두 선전용 문헌이어서 그 나라의 진짜 모습을 아는데 믿을만한 자료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의 현재를 이해하려면 북한의 과거를 알아야 했다.
나의 북한연구 첫 논문은 1981년 12월과 1982년 2월 내 연구소 잡지 <사회과학연구>에 발표된 <소련의 조선정책- 1945년 8월~1946년 2월>이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관계자의 회상록이 1965년 이래 3권 출판돼 있었다. 1981년에는 소련과 북한 관계에 대한 자료집도 간행됐다. 그리고 북한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의 기록도 있었다. 그런 자료를 토대로 한글자료를 다시 읽어 소련군 점령하 북한의 개혁·건국 과정을 재검토했던 것이다. 그 논문은 빈약했으나 소련 점령군 자료로 북한을 연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83년에는 서울의 일월서각에서 나온 논문집 <분단전후의 현대사>에 번역수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한국에서는 브루스 커밍스의 기념비적인 저작 <한국전쟁의 기원-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프린스턴대학 출판부)이 충격을 안겨준 시기였다. 미국 점령군의 방대한 자료를 구사해 남한의 개혁·건국 과정을 그린 그 책을 내가 본 것은 내 논문을 인쇄소에 넘긴 뒤였다. 아마 그 책을 먼저 읽었다면 내 북한 논문은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책을 통해 나는 미국 문서관에 한국전쟁 때 미군이 포획한 북한 문헌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같은 무렵 사와 마사히코씨의 <남북조선 기독교사론>(1981년)을 보고 사와씨가 미국 문서관에서 이 포획자료를 이미 조사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자료가 있고 그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논문을 써서 발표한 건 연구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미국에 가야겠다고 절실하게 생각한 건 그때였다. 소련에서 1년을 보낸 뒤 러시아사 연구를 위해서도 미국에 가야 한다는 기분이 든 것은 분명했다. 소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책, 복사할 수 없는 자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미국에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북한자료를 봐야 한다는 그 사정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1982년 9월부터 10월까지 40일간 미국에 갔다. 처음 20일간은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에서 러시아혁명 자료를 읽었다. 그런 중에 연락이 닿아 시애틀의 워싱턴대학을 찾아가 브루스 커밍스를 만났다. 공항에 동료 짐 파레이가 마중나와 주었다. 차 뒷창에 “Save Kim Dae Jun(김대중을 구하라)”이라 쓴 스티커가 붙어 있어 같은 생각의 소유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커밍스는 상쾌한, 기분좋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 외에 학생들 몇명을 앞에 두고 내 논문 요지를 얘기했다. 커밍스한테서 워싱턴대학에 연구하러 오라는 권유를 받고 기뻤다.
10월에 워싱턴으로 가 메릴랜드의 국가기록센터에서 북한 포획문서를 봤다. 김일성 집무실에서 꺼내온 책도 있고 자료도 있어 흥분했다. 그러나 방대한 자료의 산속에서 열흘 정도로는 도무지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다. 그 열람실에 복사기를 갖고 와 자료를 복사하고 있는 한국인 학자가 있었다. 방선주라는 그 사람은 북한 포획문서 전부를 두 번 열람하고 있다는 전문가였다. 방 선생은 잡지 <세카이>에서 내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고 했고 서로 친해졌다. 선생은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자료 복사를 하고 있다고 했으나, 포획문서로 자신의 자료 복제본도 만들었다. 그래서 그 자료복제본 한 세트를 내 연구소에서도 구입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큰 수확이었다.
워싱턴에서는 아메리카·슬라브 연구학회(AAASS)의 대회에 출석했다. 일본에서 미국에 유학하고 학위를 따서 그대로 미국 대학에 취직한 하세카와 쓰요시씨와 구로미야 히로아키씨가 와서 안내해 주었고 소련 친구 집에서 알게 된 시카고대학 제프리 브룩스도 여러 사람들을 소개해주었다. 거기서 나는 미국의 러시아사학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인상은 역시 압도적이었다.
귀국 뒤 나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미국의 러시아사학계 사람과 연구를 소개하는 소책자 <근대 러시아사연구의 새 물결>을 간행했다. 나는 흡사 아메리카라는 학문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같았다. 이런 나의 아메리카 발견을 이끌어준 것은 조선문제였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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