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2월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앞에서. 오른쪽부터 이문영 교수, 와다 교수, 이 교수 부인, 조성우씨.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⑮ 한국에서 온 사람들 일한연대 시민운동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재일한국들을 알게 됐다. <어느 한국인의 마음>(아사히신문사)의 저자 정경모씨가 <세카이>에 발표한 격동적인 문장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정씨는 이윽고 한민통의 신문 <민족시보> 편집장이 됐는데, 우리는 그의 조선 노래에 대한 관심에도 끌렸다. 언젠가 우리의 연속강좌에서 ‘조선 노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노래까지 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멋진 음색이었다. 김지하를 위한 집회에서는 <금관의 예수> 등을 불러 우리를 감동케 했다. 정씨는 뒤에 문익환씨와 함께 평양에 가는 바람에 오늘날까지 한국을 방문할 수 없다. 다음에 우리는 도쿄여자대학에서 가르쳤던 지명관씨를 알게 됐다. <사상계> 편집자였던 지씨는 일본에 망명해 있던 한국인이다. 기독교 관계의 지씨 저서에는 주의를 기울여왔으나 친하게 교류한 적은 없었다. 마침내 80년대가 돼 도쿄여자대학 오가와 교수가 나, 구라쓰카 다이라, 시미즈 도모히사를 불러 지 선생과 가끔 몰래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메이지대학 교수 구라쓰카씨는 가장 눈치가 빨라서 지씨가 <세카이>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하고 있는 TK생이라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단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고 지 선생한테서 한국정세 분석을 들었다. 선생은 언제나 온후했고, 정세를 비관적으로 볼 것 없다며 오히려 우리를 격려해주었다. 민주화 뒤에 귀국한 지 선생의 활약에 대해서는 잘 듣고 있다. 1980년부터는 나의 러시아사 강좌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 유효종이 들어왔다. 러시아 연해주의 한국민족주의운동이라는 테마를 보면 내가 지도교수가 돼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딱지붙은 ‘반한국 분자’인 내가 지도교수가 될 순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지도교수로 삼았다. 연세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체포당한 적이 있는 그는 그 얘기도 오랫동안 내게 하지 않았다. 민주화된 뒤 나는 그의 추천장을 쓰게 됐는데, 결국 그는 일본의 대학에 취직했고 한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시기에도 한국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 리 없었다. 1980년에 출옥한 김지하는 다음해 사람을 통해 내게 난 그림을 보내주었다. ‘浪打釣魚舟 和田春樹先生 阮號辛酉九月 地下居士(물결이 고깃배를 치는구나, 와다 하루키 선생, 완호신유구월 지하거사)’라고 첨서가 돼 있었다. 그런 몇 차례의 만남은 있었으나 나에게 연대의 대상인 한국과 한국인은 여전히 베일 뒤의 존재였다. 한국의 운동세계에서 곧장 다가온, 내가 본 첫 등신대의 인물은 1983년 1월에 나타난 리영희씨였다. 내가 일하는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동료로, 중국현대정치사상이 전문인 곤도 구니야스씨가 담당교수가 돼 연구소의 외국인 연구원으로 리 선생을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 기독교 단체의 지원으로 숙사는 도마자카 기독교센터로 결정됐다. 그 날 나는 센터에서 선생과 사모님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선생이 도착했고 나는 전설적인 불굴의 싸우는 지식인을 대면했다.
리 선생은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한번 웃음이 터지자 부드럽고 개방적인 인품이 전해져 왔다. 과연, 이런 분이니까 저토록 싸워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은 여권을 발급받아 출국할 수 있었던 걸 정말 기뻐했다. 숙사 근처 술집으로 가서 선생과 함께 마셨다. 선생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일본 정치가의 망언은 엄중하게 비판햇으나 일본인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소학교 시대의 일본인 교사 얘기를 그리움을 담아 얘기했다. 3개월 뒤 선생은 일본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김지하씨가 1981년 9월 와다 교수에게 보낸 난 그림.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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