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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하루키회고록] 직접 만난 첫 민주운동가 ‘싸우는 지식인’ 리영희씨

등록 2006-11-16 16:33

1984 2월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앞에서. 오른쪽부터 이문영 교수, 와다 교수, 이 교수 부인, 조성우씨.
1984 2월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앞에서. 오른쪽부터 이문영 교수, 와다 교수, 이 교수 부인, 조성우씨.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⑮ 한국에서 온 사람들

일한연대 시민운동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재일한국들을 알게 됐다. <어느 한국인의 마음>(아사히신문사)의 저자 정경모씨가 <세카이>에 발표한 격동적인 문장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정씨는 이윽고 한민통의 신문 <민족시보> 편집장이 됐는데, 우리는 그의 조선 노래에 대한 관심에도 끌렸다. 언젠가 우리의 연속강좌에서 ‘조선 노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노래까지 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멋진 음색이었다. 김지하를 위한 집회에서는 <금관의 예수> 등을 불러 우리를 감동케 했다. 정씨는 뒤에 문익환씨와 함께 평양에 가는 바람에 오늘날까지 한국을 방문할 수 없다.

다음에 우리는 도쿄여자대학에서 가르쳤던 지명관씨를 알게 됐다. <사상계> 편집자였던 지씨는 일본에 망명해 있던 한국인이다. 기독교 관계의 지씨 저서에는 주의를 기울여왔으나 친하게 교류한 적은 없었다. 마침내 80년대가 돼 도쿄여자대학 오가와 교수가 나, 구라쓰카 다이라, 시미즈 도모히사를 불러 지 선생과 가끔 몰래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메이지대학 교수 구라쓰카씨는 가장 눈치가 빨라서 지씨가 <세카이>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하고 있는 TK생이라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단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고 지 선생한테서 한국정세 분석을 들었다. 선생은 언제나 온후했고, 정세를 비관적으로 볼 것 없다며 오히려 우리를 격려해주었다. 민주화 뒤에 귀국한 지 선생의 활약에 대해서는 잘 듣고 있다.

1980년부터는 나의 러시아사 강좌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 유효종이 들어왔다. 러시아 연해주의 한국민족주의운동이라는 테마를 보면 내가 지도교수가 돼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딱지붙은 ‘반한국 분자’인 내가 지도교수가 될 순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지도교수로 삼았다. 연세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체포당한 적이 있는 그는 그 얘기도 오랫동안 내게 하지 않았다. 민주화된 뒤 나는 그의 추천장을 쓰게 됐는데, 결국 그는 일본의 대학에 취직했고 한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시기에도 한국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 리 없었다. 1980년에 출옥한 김지하는 다음해 사람을 통해 내게 난 그림을 보내주었다. ‘浪打釣魚舟 和田春樹先生 阮號辛酉九月 地下居士(물결이 고깃배를 치는구나, 와다 하루키 선생, 완호신유구월 지하거사)’라고 첨서가 돼 있었다.

그런 몇 차례의 만남은 있었으나 나에게 연대의 대상인 한국과 한국인은 여전히 베일 뒤의 존재였다. 한국의 운동세계에서 곧장 다가온, 내가 본 첫 등신대의 인물은 1983년 1월에 나타난 리영희씨였다.

내가 일하는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동료로, 중국현대정치사상이 전문인 곤도 구니야스씨가 담당교수가 돼 연구소의 외국인 연구원으로 리 선생을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 기독교 단체의 지원으로 숙사는 도마자카 기독교센터로 결정됐다. 그 날 나는 센터에서 선생과 사모님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선생이 도착했고 나는 전설적인 불굴의 싸우는 지식인을 대면했다.


리 선생은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한번 웃음이 터지자 부드럽고 개방적인 인품이 전해져 왔다. 과연, 이런 분이니까 저토록 싸워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은 여권을 발급받아 출국할 수 있었던 걸 정말 기뻐했다. 숙사 근처 술집으로 가서 선생과 함께 마셨다. 선생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일본 정치가의 망언은 엄중하게 비판햇으나 일본인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소학교 시대의 일본인 교사 얘기를 그리움을 담아 얘기했다. 3개월 뒤 선생은 일본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김지하씨가 1981년 9월 와다 교수에게 보낸 난 그림.
김지하씨가 1981년 9월 와다 교수에게 보낸 난 그림.
선생과는 그 뒤에도 오래 우정이 이어지고 있다. 나중에 선생이 베트남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도쿄의 베트남 대사관에 함께 갔다. 한겨레 특파기자단을 북한에 파견하기 위한 지원을 부탁받았을 때는 내가 야스에씨를 소개했다. 그러나 선생은 그 일로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 체포당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리 선생이 방일한 1983년 가을에 온 사람은 김대중 재판 학생피고인 조성우씨였다. 도쿄대 대학원 국제관계 코스의 연구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에 관해서는 김대중 재판 기록을 통해 읽고 있었으며 82년에는 어머니의 하소연이 담긴 편지도 읽었다. 조씨를 대학원 연구생으로 넣기는 좀 무리였으나 나는 굳이 그렇게 했다. 연구면에서는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을 번역한 정도로, 결국 대학원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재일한국인 청년들에게 영향을 끼쳐 민족문화운동단체 ‘한우리’가 결성된 것은 조씨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꿈을 꾸는 타고난 조직가였다. 그는 87년 민주화 뒤 바로 귀국했다.

1984년 가을, 나는 커밍스의 주선으로 워싱턴대학에 초대받아 2개월간 연구를 했다. 첫 1개월은 커밍스 집에 머물면서 워싱턴대학에서 연구했다. 커밍스를 깊이 관찰하면서 미국에서 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했다. 12월에는 워싱턴에 가서 전년도에 한국을 떠나 미국에 망명한 김대중씨를 만났다. 그것은 12월14일로, 국립문서관 계단에서 기다려 만났다. 그 건물 네 귀퉁이에는 표어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하나에 ‘영원한 감시가 자유의 비용이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건물속에 정부활동 기록이 있다. 들어가 그 기록을 점검하고 정부활동을 계속 감시하라.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그 건물 앞에서 나는 김대중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된 시각에 커다란 차가 와서 섰고 나는 차 안으로 불려 들어갔다. 차속에 김대중씨가 있었다. 나는 동북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 우리 시대의 영웅과 대면했다. 그리고 식당에 함께 따라가 거대한 새우를 먹었다. 댁에도 초대받아 이희호 부인도 만났다. 김대중씨에 관해서는 너무다 자세히 조사하고, 읽고, 또 썼기 때문인지 희안하게도 별로 알 얘기가 없는 듯 느껴졌다. 김대중씨는 이미 한국에 돌아갈 날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는 자신이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1985년에는 또 서울대학 이인호 교수로부터 10월 말 소련동유럽연구 세계대회 때 선생 세션에서 보고해달라는 권유를 받아 워싱턴을 방문하게 됐다. 그 때 함께 세션에서 보고한 사람이 김학준씨다. 한국의 러시아·소련연구 중심에 서 있던 두 사람은 80년대 후반에 나를 서울에 불러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 주었다. 그때는 여전히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나는 두 사람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다. 이 선생은 나중에 러시아대사 재임중 모스크바에서 열린 내 러시아어 저서 출판기념 파티에 함께해 주었다.

이 선생 세션 뒤 나는 김대중 재판 피고였던 학생운동 지도자 이신범씨를 만났다. 이신범씨는 워싱턴의 싱크탱크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뉴욕에 간다는 내 얘길 듣고 작가 황석영을 만나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래서 나는 11월 초 뉴욕의 한국인 커뮤니티에 있는 청년봉사교육센터를 찾아가 황석영을 만났다. 그는 거기서 청년들의 마당굿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번역된 <낙타누깔>을 읽은 정도였으나 유명한 <객지>에 대해서는 이미 듣고 있었다. 장편소설 <장길산>은 서점에서 눈여겨 봤다. 전두환 시대가 되자 정면에서 싸우고 광주사태 기록물을 낸 뒤 출국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황씨는 거드럼피우지 않는 작가로, 금방 어울려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일본에 가 보고 싶다고 하기에, 입국할 때는 도와주겠다고 얘기했다. 실제로 그 해 12월에 황씨는 내가 신원보증인이 돼 일본에 왔다. 일본에서는 조성우씨가 가담한 민족문화단체 ‘한우리’와 함께 마당굿 공연을 전국 각지에서 벌였다. 나는 황씨와 인터뷰해서 ‘한국현대사와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세카이>에 3회 연재했다.

1985년 여름에 나는 북한연구로서는 두 번째인 ‘김일성과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사상> 7월호와 9월호에 발표했다. 중국 문헌으로 김일성의 실상을 밝히려 한 것이다. 내가 북한연구를 자기 전문테마로 공언한 것은 그때였다. 1986년 초 한국에서 학생 한 명이 와, 내 밑에서 북한을 연구하고 싶다, 내 연구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서동만씨다. 내 밑에서 북한을 연구한 단 한 명의 대학원생이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번역/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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