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 군위안부와 일본인 납치(3)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또 하나의 장치가 있다. “문서·서류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협의의 강제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드러나더라도 그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문서가 없는 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만들어낼 안전장치다. 패전이 가까웠을 때 일제는 다량의 문서들을 불태우거나 폐기처분했다. 일본 우익의 논법에 따르면, 그로써 문서가 기록했던 수많은 사실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은 모두 ‘날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얘기다. 일본 제국주의는 패전 뒤 경제적 번영과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한 화평시대에도 침략과 식민지배 범죄를 자행한 당사자들의 자기고백과 고발, 사죄가 매우 드문 특이한 사례다. 미국의 점령과 냉전전략, 전범자들의 사면과 부활이 그 배경에 있다.
아베 등 우익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또 다른 키워드는 ‘납치’, 북한의 일본인 납치다. 그들이 보기에 강제성이란 바로 북한이 자행한 짓, 곧 적국의 국가조직이 몰래 침투해 자국민을 강제로 끌어가는 주권 유린적 만행에나 쓰는 말이다. 이거야말로 아베가 주장하고 싶은 ‘협의의 강제성’의 전형이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은 설사 있었다 할지라도 북한의 납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익들의 심리세계에서 이는 바로 일본군 위안부 모집은 강제성이 없었고 따라서 죄악이 아니다로 둔갑한다. 그럴수록 북한 납치 죄악은 더욱 강조되고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우리는 그렇게까진 하지 않았다’를 자기 스스로에게 또한 외부인에게 설득하기 위한 장치다. 그것은 종종 자민당 주류 간부들이 일제의 만행을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견주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독일식 전범 사죄를 일본이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할 때 주워섬기는 얘기다. 독일은 사죄하고 배상해야 마땅하지만 일본은 그렇게 해야 할 만큼 나쁜 짓 하지 않았다는 선전이요 자기기만이다. 이 기만이 통용된 배경에도 역시 미국이 있다.
그럴수록 일본은 ‘선’이고 북한은 ‘악’이 돼야 한다. 일본 우익들에겐 북한 납치문제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모든 죄악을 선으로 세탁하고 그 제국주의 침략을 영광의 역사로 떠받드는 자신들을 ‘자유와 민주주의와 정의의 화신’으로 전도시키는 만능열쇠다. 북한을 보라! 국가조직이 직접 사람을 몰래 끌어가지 않았나! 우린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과연 그럴까? 가미카제로 가고 위안부로 간 게 다 자발적으로 그랬다고 우길 정도로 조선사람들을 저능아로 본단 말인가. 제국주의자들이 군사적으로 강했다는 게 곧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그들이 우월했다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한때 중국이나 조선보다 훨씬 센 군사강국이었던 몽골이나 거란, 여진, 왜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그럼에도 제국주의자들은 예외없이 자신들의 무력적 우월을 전면적인 우월로 착각하거나 의도적으로 조장했다. 바로 식민사관의 뿌리다. 변방에서 일약 중심으로 떠오른 근대의 ‘영광’에 들뜬 일본우익들은 그걸 내면화하고 있다.
어쨌거나, 은혜로운 제국주의, 선한 식민지배는 ‘모순’이란 말만큼이나 그 자체가 모순된 어법이다. 있을 수 없는 얘기다. 모든 제국주의적 팽창은 타자를 파괴하거나 포섭함으로써 타자의 에너지를 자기확장의 재료로 흡수하는 과정이며, 피지배자 집단은 침략국에 투항한 소수 엘리트 계급을 빼고는 모두 피억압자로 이중의 착취를 당하게 된다. 은혜로운 제국주의, 선한 식민지배가 존재했다고 착각하는 일본 전후세대 우익들은 솔직하지 못하거나, ‘우물안 개구리’거나 자기기만의’ 유아적 심리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자들인지도 모른다. 60여년에 걸친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길러낸 의식의 한 정점이 그런 유치하고 이기적인 유아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 슬픈 일이며, 그걸 알면서도 그런다면 인간이하로 막가자는 것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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